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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判讀用書> 사숙할 대상을 만들어라

<독서-2> 김용옥, 헤세, 도스토옙스키. 나를 압도했던 이들

by 조창완

사숙(私淑)이라는 말이 있다. 존경하는 사람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을 수는 없으나, 그 사람의 도나 학문을 본으로 삼고 배우는 것을 말한다. 너무 먼 시대 사람을 사숙할 수도 있지만, 같은 시대를 산 사람도 가능하고, 약간 시간이 지나도 충분하다. 공자를 따랐지만 직접 볼 수 없었던 맹자의 모습이 사숙에 가장 가까운 모습일 수도 있다.


사숙은 위대한 사람을 향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근대에는 해월 최시형이나 함석헌 선생 같은 분을 사숙했다는 분들을 많이 봤다. 그리고 사숙도 대를 이을 수 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선인인 성호 이익을 지적 스승으로 사숙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당대에는 박석무 선생이 다산을 사숙해 다양한 저술과 관련 활동을 한다. 나름대로 흥미로운 사숙 관계라고 할 수 있다.


대학에 들어가 책을 읽을 때, 문학이나 국어학을 파는 것 보다는 문화나 철학에 손이 많이 갔다. 아마 문학으로 사숙을 했다면 요절한 평론가 김현 선생을 사숙했을텐데, 내 사숙의 대상은 엉뚱했다.


대학 1학년 중반쯤에 나는 도올 김용옥의 <여자란 무엇인가>를 우연히 들었다. 아마 연애가 궁해서 연애 비법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책을 만난 후 순식간에 종횡무진 달리는 도올의 지식세계에 빠져 버렸다.

1985년 11월 고려대 강의를 정리한 그 책에서 도올은 내가 품고자 했던 다양한 지식을 엄청나게 배열해줬다. 랑그와 빠홀로 이야기되는 모국어 문제, 유목문화, 여성 문제 등도 전반적으로 배열되어 있었다. 특히 남성과 여성에 대한 분리적인 사고를 넘어서 경계를 넘나드는 지식의 포용력을 보여줬고 나는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이후 나는 도올의 책을 하나하나 읽어갔다. 도서관에 있는 책을 빌려 읽고, 없는 책은 사기도 했다. <나는 불교를 이렇게 본다>, <도올세설>, <대화> 등은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고,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는 서점에 있어서 구입했는데, 아직도 내 서고에 꽂혀있다.

KakaoTalk_20210929_145255797.jpg 내 서재에 있는 도올 김용옥의 저작들.


문제는 도올을 통해 새로운 지식 세계에 빠져 든 것이다. 도올을 읽다보면 불교에 대한 지식, 화이트 헤드 등 서양철학에 대한 엄청난 질문이 생겼다. 결국 내 책읽기도 도올 김용옥을 기둥으로 삼고 주변에 하나하나씩 쌓아가기 시작했다. 대학 이후 내 독서에서 2~3할은 도올을 통해 이끌렸다.

이후로도 도올의 책은 가능하면 챙겨서 읽었다. 그러는 가운데도 도올의 변화도 무궁무진했다. 원광대 학의학과에 뒤늦게 입학해 한의원을 차리기도 했고, 신문 기자가 되어 문화탐방 기사를 연재하기도 했다. 1999년에는 방송강의로 노자를 소개하는 <노자와 21세기>와 <도올 논어>를 진행했다.

1999년 중국으로 건너간 후인 2001년 한국에서 도올에 관한 격론이 벌어지기도 했다. 나는 멀리 있었지만 도올을 사숙하는 사람을 떠나 그를 변호하고 싶었다. 2001년 2월 오마이뉴스에 올린 ‘도올도 모르면서 도올을 욕한다?’(부제:서지문 교수의 비판, 논리 아닌 감정 반박 머물러)가 그 기사다. 당시 서지문 교수는 도올이 과민하게 공자를 비판하는 것에 대한 반감 기사를 썼고, 이것이 논란이 됐다. 2월 23일에는 ‘월간조선 탁석산의 글과 최근 기사를 반박하며’라는 글을 통해 도올에 대한 공격을 방어하기도 했다.

2008년 귀국한 후에는 도올이 출간하는 책을 더 쉽게 볼 수 있었다. 2015년에는 중국 동북지역의 우리 유산을 답사한 후 내놓은 <도올의 중국일기> 5권도 꼼꼼히 읽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중국에 있으면서 끊임없이 봤던 동북지역의 고대 유적부터 근대 항일독립운동을 포괄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도올은 시진핑 등 당대 지도자에도 적지 않은 공을 들였다. 하지만 그가 김우중 등 리더 들에 보인 필요 이상의 옹호가 중국에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후 최근에는 동학부터 기독교 서적까지 보인 관심도 흥미로웠다.


오십 초반을 넘어 중반으로 향하는 내게 도올을 사숙한 것에 대한 후회를 물어보면 나는 절대로 후회는 하지 않는다. 우선 도올이 경계에 있던 훌륭한 학자였다는 것이다. 사실 어떨 때면 내가 도올에 관한 글을 쓸 때, 부덕하다는 표현을 쓸 정도로 일방적으로 봤던 것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내가 필요하다면 도올을 볼 기회는 없는 것이 아니다. 도올의 강연이나 방송 등도 어렵지 않게 찾아가 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찾아가지 않는다. 그렇지만 도올의 책을 출간하는 출판사에서는 새로운 책이 나오면 꼭 나에게도 보낸다. 더러 서평으로 반영하지만 일방적으로 한 책에 관한 서평을 쓸 수 없어서 자제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도올보다 빨리 본 인물도 있다. 바로 헤르만 헤세다. 대학을 떨어지고. 제수하던 시절에 나를 위로 해준 책은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나 <논어> 같은 책이었다. 솔제니친의 책에서 만난 수용소는 재수하는 상황에 빠진 나로 과장해서 느꼈다. <논어>에서는 세상에 이런 깊이로 무엇을 볼 수 있다는 것에 경악했다. 그런데 그와 더불어 나를 안아준 인물은 헤르만 헤세다. 나는 <수레바퀴 아래서>를 읽으며 내 처지와 주인공 한스의 처지를 동일시 했다. 물론 헤세에 대한 마음은 <삶이 고달프면 헤세를 만나라>를 통해 충분히 말한 만큼 더 할 말은 없다.


대학 시절에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 유희>를 읽고 나서는 헤세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를 했다. 그런데 그때 다가온 것이 도스토옙스키였다. <좌와 벌>을 시작으로 나는 그를 사숙하리라 할 만큼 빠졌다. 어떻든 마지막 관문인 <카라마조프네가의 형제들>까지 읽었다. 헤세처럼 성장이 아니라 선악이 공존하는 문학의 느낌을 처음 깊게 느꼈다.

그것은 성장과는 다른 존재의 문학이었다. 물론 대학시절에 조정래 작가의 소설들을 모두 읽으면서 우리 문학에도 심취했지만, 더 깊게 다가온 것은 헤세나 도스토옙스키 같은 작가였다.

그럼 내게 사숙하는 시간은 어떤 의미였을까. 우선 도올의 매력은 한 분야가 아니라는 것이다. 종교로 봐도 기독교, 불교, 동학은 물론이고 무속까지 대부분의 종교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고 있다. 도올 다운 지적 확장성이 있다. 때문에 내 입장에서는 한 종교를 깊이 팔 이유가 없었다. 경계를 넘어서 종교의 여러 세계를 가질 수 있었다. 지금도 페이스북 한 공간에는 ‘종교는 철학의 시녀다’라는 말을 써 놓았다. 종교도 결국 인간이 만든 신의 역사라고 본 것이다.

또 다른 매력은 지식의 경계가 없다는 것이다. 도올은 문학, 예술은 물론이고 어학 등에서 정통한 만큼 그가 해석해준 것들을 더듬어보는 재미가 있었다. 또 그의 콘텐츠는 책도 있지만 방송 강의 등도 많아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때로는 시사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도 있어서 세상을 읽는 좋은 창이 되어주기도 했다. 혼돈스러운 부분이 있을 경우에는 나랑 다르구나 하는 느낌으로 과감하게 삭제하면서 읽었다.

사숙 관계로 기억나는 분 중에 하나가 연암 박지원을 사숙했던 고전평론가 고미숙 선생이다. 고미숙 작가는 전작이 있지만 2003년 3월에 출간한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으로 많은 독자팬을 얻었다. 이 책은 고전을 그냥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사람이, 오늘날의 코드로 고전 텍스트에 접근하는 방식이었다. 고전을 읽으면서 그것을 자신의 삶의 일부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 작업에서 고미숙은 연암에 푹 빠졌고, 이 책을 대한 열렬한 사랑과 훌륭한 프리즘으로 그것을 이루어냈다. 다만 고미숙 작가는 사숙하는 대상을 여기에 멈추지 않았다. 고작가는 이후 임꺽정, 허균, 루쉰 등으로 사숙의 범위를 넓혔다.

앞으로 내 책 읽기도 크게 이런 범위는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도올은 내가 배울 것이 워낙에 많아서 더 말할 나위없이 그의 책이 나오면 살 것이다.


그간 사숙하고 싶었으나, 텍스트의 부족으로 놓친 분 중에 가장 아쉬운 분은 단재 신채호 선생이다. 평소 반갑게 만나는 김삼웅 선생이 평전은 쓰셨지만 그의 사상 전반을 다루는데까지 미치지 못했다. 사실 단재 선생에게는 우리 민족의 가장 큰 기본 사상이 될 디아스포라의 정신이 있었다.

탁월한 지식인이었던 단재 선생은 초반기 성균관에서 박사를 마친 유학자였다. 이후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에서 주필로 활동했던 언론인이었다. 이후 나라가 망하자 우리 민족의 힘을 담은 광개토대왕, 을지문덕, 최영, 이순신 등의 평전을 쓴 다큐멘터리스트였고, 미국, 서양사에도 밝았다. 조국이 망하자 바로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학을 공부했다. 중국의 모든 지식을 담았다는 <사고전서>를 보고, <조선사통론>, <조선사문화편>을 쓴 사학자가 됐다. 임시정부에서는 이승만에 반대하던 정치가 였다. 1923년에는 김원봉의 부탁을 받아 조선혁명선언(의열단 선언문)을 짓는 혁명가였다. 스스로가 아나키즘의 영향을 받은 스스로 첩보원으로도 활동했다. 그 첩보활동 중에 정보가 노출되어 대만에서 잡힌 후 따리엔 뤼순감옥에서 수형생활을 하다가 옥사했다.


나는 베이징이나 동북지방, 단재 선생이 체포된 대만 기륭항, 돌아가신 뤼순감옥을 지나면서 단재 선생이 가진 사상에 대해서 많은 호기심이 있었다. 또 방송 다큐멘터리를 촬영하기 위해 베이징도서관에 갔다가 단재 선생이 만든 ‘천고’를 만나기 직전에 막히 아픈 기억이 있다. 만약 그때 촬영에 성공했다면 우리 방송에서는 최초공개였을 텐데, 너무 아쉽기도 했다.

다행히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 9권으로 <단재 신채호전집>을 만들어 두었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공부의 착수가 가능하다. 먼 훗날 진짜 사숙하고 싶은 단재 선생의 기록을 정리하면 서른번째 책은 단재 선생에 관한 책이 될 수도 있을 듯 하다.

단재.jfif 뤼순감옥 옥사에 있는 단재 선생에 관한 소개글. 몇년전 갔을 때는 이 판넬은 사라진 상태였다. 대만 기륭항에서 체포된 후 뤼순감옥에서 수형생활을 하다가 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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