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6> 집착하면 더 도망하는 행복
“당신은 행복하십니까?”
이 질문처럼 당혹스러운 경우는 많지 않다. 행복의 절대기준이란 없기 때문이다. 수조원을 상속받고도, 당장 절반 가량을 세금으로 내야하는 재벌 2세는 정말 괴로울 것이다. 미리 상속 절차를 밟았으면 이렇게 세금을 많이 내지 않아도 될 것이라며 돌아가신 분을 원망할 수 있다. 또 형제간의 불협화음으로 합의에 이르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원망할 대상도 많아진다. 왜 이 정부는 이렇게 상속세를 올려서 가업을 유지하기 힘들게 하는 지에 대한 원망이 이어지 국가도 싫어질 수 있다. 그들이 행복할까.
실제로 고급 아파트를 소유한 사람이 경제적 불안감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한다. 그 아파트만 처분하면 주변지역에서 평생을 편안하게 살 수 있음에도 그는 불안한 것이다. 이렇듯 행복은 어떻게 수치화할 수도 없다.
난 행복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마테를링크의 동화 <파랑새>다. 크리스마스 전날 밤, 나무꾼의 아이 틸틸와 미틸 남매는 창문을 통해, 즐겁고 화려한 부잣집의 크리스마스 이브를 보고 있었다. 이때 요술쟁이 할머니가 들어와서 병을 앓고 있는 자기 딸을 위해서 '파랑새'를 찾아 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면서 마법의 다이아몬드가 빛나고 있는 초록 빛깔의 모자를 준다. 그 다이아몬드를 돌리면 현실 세계는 단번에 변하고, 몽환(夢幻)의 신비로운 세계가 나타난다. 틸틸와 미틸는 빛과 개와 고양이, 설탕, 그리고 빵의 요정을 거느리고 파랑새를 찾으러 나간다. 그들은 여러 나라에서 신비롭고 불가사의한 체험을 하게 된다. '추억의 나라'에서는 돌아가신 조부모와 동생들을 만나고, '밤의 궁정'에서는 '병', '공포', '비밀', '전쟁' 등의 참된 모습을 본다. 거기에서 '파랑새'가 무수한 달빛을 받으며 날고 있는 것을 새장 속에 잡아 넣었지만, 햇빛 속에서 그 새들이 즉사하고 만다. 밤의 '숲' 속에서는 여러 가지 수목의 정령, 동물의 정령과 싸우고, 자연의 무서움을 깨닫는다. 또한 그들은 '묘지'에서는 죽은 사람 속에 무서운 사람은 하나도 없을 뿐더러 죽음이 삶의 찬미가를 부르고 있는 데 놀란다. 이윽고 그들은 '행복의 궁전'에 도착한다. 거기에서 진실한 행복과 비참한 행복의 구별을 알게 된다. 여기서 이른바 '행복들'은 제각기 의인화되어 아름다운 옷을 입고 등장한다.
두 사람이 만나는 최초의 행복은 '사치스러운 행복들'이며 매일같이 잔뜩 배불리 먹고 마시는 행복이지만, 그들은 즉시 애처롭고 처참한 모습이 되고 만다. 아이들이 진실한 행복인 '건강의 행복', '푸른 하늘의 행복', '사리를 깨치는 행복', '부모가 사랑하는 행복', '정의의 행복'들을 만나고 마지막으로 세계의 중심인 '어머니 사랑의 행복'과 함께 이야기하고 그 사랑이 얼마나 아름답고 맑고 무한한 자비로움을 가지고 있는가를 안다. 그리고 '파랑새' 일을 '행복'들에게 물어 보고 틸틸는 웃음을 사고 만다. '파랑새'는 이 행복 속에 있는 것이 암시되고 또 상징되고 있다.
이윽고 틸틸와 미틸는 '미래의 나라'로 들어가 아직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을 만나 지구의 미래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다. 그것은 밝고 즐거운 미래인 것이다. 틸틸와 미틸가 '파랑새'를 찾는 기나긴 여행을 끝내고 꿈에서 깨어 보니 바로 크리스마스이다. 두 사람은 꿈속의 체험으로 말미암아 부모는 한층 더 부드럽고 자기들의 방은 이상스럽게 아름답게 보인다. 이때 이웃에 있는 노파가 들어온다. 두 사람은 요술쟁이 할머니를 기억한다. 그리고 자기들의 새장 속의 비둘기를 보니 비둘기는 이상스럽게 파랗게 보인다. "우리들이 찾고 있던 것이 이것이다. 먼 곳까지 찾으러 갔으나 여기 있었구나" 하며 알아차린다. 그리고 노파의 병든 딸에게 그 비둘기를 주니 딸은 몸이 완쾌된다. 딸은 비둘기를 가지고 틸틸가 모이를 주려고 하는 동안에 날아가 버린다.
이런 이야기는 동양에도 많다. 남가일몽(南柯一夢)이나 한단지몽(邯鄲之夢 )도 그런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다. 우리 세대가 고등학교에서 배운 서포 김만중의 <구운몽>도 주인공 성진을 통해 인생의 행복이라는 게 별다른 게 아니고, 덧없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이야기다.
그럼 나에게도 묻는다. 난 행복하냐고. 난 자신있게 말한다. 난 행복하다고. 사실 특별히 부자도 아니고, 안정적인 직장을 가진 것도 아니다. 하지만 살 집이 있고, 노년에 의지할 작은 연금이 있고, 아내와 아이가 있고, 돌아갈 수 있는 고향도 있다. 또 건강만 나쁘지 않다면 늦은 나이까지 일을 할 수 있는 다양한 재주도 있다. 더 추구할 수도 있겠지만, 굳이 그런 것을 원하고 싶지는 않다.
또 수익은 불안정하지만, 내가 도움을 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열여덟 어른’ 등 몇곳에 정기적으로 작은 돈이라도 기부하니,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고 있다는 안심도 한다. 작은 것이라도 남들에게 베풀 수 있다면 그건 행복에서 가장 깊은 단계로 나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그럼 내가 가진 행복에 대한 정의는 타당한 것일까. 굳이 집착할 일은 없지만 행복이 무엇인지 따라가 보자.
행복에 대한 정의는 아주 많다. <행복론>으로 알려진 세네카는 재산·명예·쾌락이라고 하는 것은 진정한 행복의 제1조건이 아니고, 정신(靈魂)의 건전성이야말로 필요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미덕을 추구하고, 자연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행복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남들과의 관계 속에서 재능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는 방식으로 자신이 아닌 남들 속에서 살아가는 삶을 꼬집는다. 결국 행복은 좋은 품성을 가지고, 세상의 이치에 따라서 만족하면서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나는 세네카의 행복론이 가장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앞서 말했듯이 재산이 행복의 가늠자라면 어디까지 행복인지 규정하기 힘들다. 실제로 세계에서 가장 행복만족도가 높은 작은 불교 국가 부탄이라는 말도 있다. 물론 부탄은 전제국가에 가까워 꼭 그렇게 보기 힘든데, 통상적으로는 핀란드 등 북유럽 복지국가들의 행복지수사 가장 높다. G8이라는 우리나라는 통상 50위권 밖에 순위여서 소득에 비해서 행복지수가 상당히 늦은 나라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한국은 평생 경쟁이라는 상황을 벗어나기 힘들기 때문이다. 때문에 자살률은 가장 높은 나라가 한국이다. 일반적으로 안정적인 가정에서 안정적인 교육을 받고, 안정적인 직장을 갖는 게 행복으로 가는 정도라는 인식이 강하다.
100세가 지났지만 왕성하게 강연과 집필을 하는 철학자 김형석 교수도 세네카가 가진 행복의 가치와 비슷하다. 김교수도 행복해질 수 없는 두부류의 사람을 말한다. 한 부류는 정신적 가치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한다. 복권에 당첨된 사람들이 엄청난 물질적 풍요 속에서도 행복하기 쉽지 않은 것은 돈과 권력, 명예 같은 소유욕에 집착하고, 정신적 가치를 찾지 못한다는 이유다. 정신적 가치를 찾는 사람들은 만족을 알고, 거기에서 행복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자신만을 위해 사는 이기주의자라고 말한다. 이런 부류는 인간 관계에서 오는 선한 가치인 인격을 갖지 못하고, 결국 행복도 멀어진다고 말한다.
반면에 쇼펜하우어는 행복을 쾌락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괴로움을 어떻게 잘 견뎌가는 힘이라고 말한다. 나는 청년 시절에 쇼펜하우어나 키에르케고르 등 약간 염세주의적인 철학자에 빠진 적이 있다. 도서관에 그들의 책을 찾아 읽으면 다른 책들보다 공감이 간 기억이 있다. 사실 사람이 태어나면 괴로운 일을 겪지 않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또 괴로운 일을 겪지 않고 편안하게만 산 인생이 결코 좋은 사람으로 성숙하는지는 의문이다. 특히 젊은 시절에 자신의 부족함이나 의지의 부족으로 인해 수많은 실패를 겪는 일이 많은데, 필자도 마찬가지였다. 내 이십대는 갈짓자로 살았다. 무작정 달려든 행정고시와 대입에 실패하고 스무살에 고향 마을에서 단기사병(방위)으로 군복무를 했다. 마치기 91년 10월 복무를 마치고, 농사일을 도운 후 서울에 도착했을 때, 내 몸무게는 60킬로그램을 깬 적도 있다. 다행히 그해 대학입시를 통과해서 위기는 모면했다. 대학 4학년 가을에 기자로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IMF가 터지고, 나는 아버지가 어렵게 마련해준 구파발 전셋집을 순식간에 잃어 버렸다. 99년 결혼과 함께 중국으로 건너간 것은 아내가 중국에서 유학중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서울에서 마땅히 살 집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내가 불행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중국으로 건너가면 뭔가를 해서 돈을 벌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실제로 이런저런 기고와 방송 프리랜서, 코디네이터 일을 통해 생활도 할 수 있었고, 가족도 꾸려갈 수 있었다. 톈진과 베이징에 살 때는 주재원처럼 고급 아파트는 아니지만 그래도 충분히 안정적으로 생활할 수 있는 아파트에서 거주했다.
2008년 초 중국에서 한국으로 건너올 때도 너무도 갑작스러운 일이라 아무 것도 예측할 수 없었다. 하지만 건너와서 우리 가족은 한국 생활을 했다. 주변의 도움도 있었지만, 순간순간을 성실하게 대처했고, 별 문제 없이 13년을 살았고, 아직은 대출이 남아 있지만, 이사 걱정이 없는 괜찮은 아파트도 마련했다. 결국 이런 상황을 내가 불행이라고 여겼다면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한 고비도 넘지 못하고, 우리 가족은 불행해지고, 위험에 빠질 수 있었다. 그런데 가장 큰 힘은 가족들과의 믿음에 있었다.
올 여름 어렵게 들어간 공직을 그만둘 때도 아내에게 충분히 물었다. 물론 아내는 처음에 말렸다. 하지만 내 마음이 이미 떠났다는 것을 알고는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다. 아이도 내가 무엇을 하든 옳은 일을 한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특별히 동요하지 않고, 자신의 일을 한다.
우리 부부가 살면서 가장 행복한 순간 중에 하나는 아이가 학교에서 받은 자존감 검사에서 100점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다. 7살까지 중국에서 중국어에 더 익숙하게 살다가 한국에 들어와서는 급히 한국어를 익히느라 고생을 했다. 아픈 가족 일도 있고, 분당과 인천을 오가는 이사를 했지만 아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을 믿는 모습을 보니 대견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가족 간의 믿음이 있다는 것은 살아가면서 가장 행복하게 느끼는 원천이다.
지금도 아내와 아이는 밤늦게까지 이야기를 하는 모습을 많이 본다. 아이는 대중문화부터, 세계사 등을 아내에게 설명하면서 이야기를 나눈다. 우리 당대 대중문화에 해박한 만큼 아내도 인식하지 못했던 과거를 듣다보면 자연스럽게 힐링이 된다고 한다. 이제 친구라 해도 과거와 현재에 대한 지식을 갖고, 이야기를 들어줄 대상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아직도 중국 왕조사를 제대로 암기 못하는 아빠보다는 휠씬 낫다. 그런 점에서 아이가 나보다 나은 점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가장 큰 행복 가운데 하나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