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신중년 앞 30년 인사이트]
신중년은 보통 ‘2차 베이비부머’로 불렸다. 그런데 새로운 호칭이 생겼다. ‘마처세대’라는 별칭이다. 이미 지식백과에도 등재된 이 말은 ‘부모를 부양하는 마지막 세대, 자녀에게 부양받지 못하는 처음 세대라는 뜻이다. 베이비부머와 586세대가 주로 포함된다.’라고 정의된다.
사실 이 단어는 최근에 생긴 말은 아니다. 2008년 서울신문 노주석 논설위원에 짧은 세평의 칼럼 제목으로 이 단어를 쓴 흔적이 있다. 노위원은 당시 1950∼60년대에 태어난 1, 2차 베이비부머 전체가 가진 이 상황을 한탄했다. 그러면서 강주한 내용이 눈에 들어온다.
“처세법의 첫머리는 재산을 물려주는 대신 용돈을 줄 것, 자녀교육과 혼사에 재산을 올인하지 말 것, 제2의 직업을 찾을 것, 배우자나 친구와 함께할 수 있는 취미생활을 가질 것 등등이었다. 병이나 사고만 없다면 90살이 아니라 100살까지도 살 수 있는 좋은 세월이지만, 믿을 것은 자신 뿐인 딱한 세상이 돼 간다. 글쎄 이게 아닌데….”
이미 15년 전 이야기인데도 우리 신중년 세대의 폐부를 찌른다. 여전히 유효한 조언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신중년도 마처세대에 들어간다. 어떻든 우리도 부모님을 모시겠다는 의식이 비교적 견고하고, 아이들을 위해 인생을 몰빵 하는 세대이기 때문이다.
물론 마처세대는 신중년 대에서 끝난다고 할 수 없다. 한국의 전통상 부모 봉양과 자식 건사의 의무는 결코 쉽게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의무의 연결고리는 안팎의 이유로 영원할 수 없다. 그렇다고 신중년이 자식에게 자신을 부양해 주길 바라는 경우는 많지 않다. 우리 형제 가운데 신중년에 해당하는 이는 1969년생인 나를 포함해, 1972년생인 여동생, 1975년생인 막내 남동생이다. 사실 우리 7남매는 1940년생으로 올해 84살인 어머니를 모시기는커녕 아직도 부양을 받는 느낌이다. 어머니는 팔순이던 2019년 고향에 새로 집을 지으셔 자식들이 나중에 도시서 고생하지 말고 내려와 살 기반을 만들었다. 집이야 장남인 형이 물려받겠지만, 주변에도 넓은 택지를 두어서 작은 돈만 있으면 옆에 집을 들일 수 있게 준비했다. 어머니가 연세가 더 드셔서 혹시 돌봄이 필요한 시간이 되어도 7남매가 나누어서 모실 수 있기 때문에 큰 걱정이 없다. 더 다행인 것은 1년에 4번 정도 가족이 모여도 큰 소리 한번 나지 않고 지나가는 것도 다행이다.
내 주변 사람들의 사정을 다 알 수 없지만, 부모님을 모시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할 정도로 힘든 친구들은 거의 없다. 역시 보통은 5형제 정도는 있고, 잘살든 못살든 이 구조안에서 분담하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아이 세대에 가면 ‘부양하거나 부양받는다’는 말은 전설이 될 가능성이 많다. 인구통계에서 보듯이 2035년이 넘어가면 경제활동인구 2명이 한 명을 부양해야 하는 사회구조가 된다. 이 부양에는 생활비뿐만 아니라 의료비 등도 포함된다. 사실상 부양을 할 수 있는 구조적인 문제가 생긴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앞서 말한 우리 형제 가운데 신중년 3명의 미래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특히 우리 부부는 아이가 한 명이라 부양받을 가능성은 기대하지 않는다. 사실 대학이나 대학원을 졸업하고, 직장을 잡고, 결혼을 하고, 집을 장만하는 데,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한다.
아이가 결혼할 것으로 예상되는 10년 후인 2033년, 우리 부부는 64세로 일반적인 직업생활을 마치는 시기다. 다음 해부터는 연금대상자가 된다. 국민연금이나 공무원 연금 등이 별 무리가 없이 유지되어 지급된다면 중류층 정도의 삶은 살 수 있다. 하지만 필자는 지금의 인구 구조 등을 봤을 때 가능성을 높게 보지 않는다. 일단 불안한 것은 한국이 지금 가진 경제력을 유지할 수 있을 가능성을 높게 보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그때부터 신중년은 독립전쟁을 해야 한다. 다행히 의지할 배우자라도 있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남자든, 여자든 적지 않은 고통의 길이 기다리고 있다. 노년의 독립운동은 당연히 수많은 고통이 따른다. 다행히 경제적 여유가 있다면 고급 실버타운부터 독립된 전원하우스까지 다양한 길이 있다. 하지만 중간 정도의 수입이 있다면 그런 곳은 엄두도 내지 못한다.
결국 경제적 부담이 없으면서도, 안락한 노후 생활의 비법을 찾아서 익힐 수밖에 없다. 때문에 신중년 라이프에 대한 미리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 필자처럼 농촌이 고향이라면 이럴 때 선택할 수 있는 곳 가운데 하나가 지방이다. 인구 감소라는 치명적인 상황에 직면한 지방은 신중년을 흡수해야만 어느 정도 기본 인구를 유지할 수 있다. 신중년의 부모세대에 해당하는 분들이 이제는 80살이 넘어간다. 지금 우리나라 평균 수명은 83세가량이다. 이 수명이 향후 무한하게 늘지 않는다. OECD 평균수명이 2019년 81세로 정점을 넘은 후 지금은 80.5세까지 떨어진 것이 그 원인이다. 물론 이는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특수상황이 준 영향도 있지만 의학 발달이 수명의 무한한 증가를 담보할 수도 없다는 게 정설이다. 이때 지방은 좋은 안전장치가 될 수 있다. 문제는 나이가 70살이 넘어서 가는 지방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지방으로 가는 연령도 늦어야 60살 정도는 되어야 지방에서 자기 역할도 생긴다.
20년 후면 신중년들은 70대를 넘어선다. 신중년 이모작도 끝이 75살 정도니, 그때가 되면 마지막을 준비하는 시기가 된다. 사실 그때 가장 아쉬운 게 자식에게 부양받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그럼 필자의 20년 후는 어떨까.
2043년은 좀 멀지만, 20년 전을 생각하면 그리 멀지 않다고 생각한다. 2043년의 전반적인 우리나라 상황은 어떨까. 그때 고령인구 비중은 36% 정도고, 노년부양비는 50%가 넘어서 2명이 한 명의 고령층을 부양하는 시대가 된다.
말이 부양인구지, 그때의 부양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진행될 수밖에 없다. 국민연금을 수령하는 층이 지금보다는 늘어나지만, 그때라고 해서 수령액이 충분히 노년생활을 할 정도는 아니다. 더욱이 2019년 국회 예산처가 내놓은 국민연금 운영 예상을 보면 2054년이 되면 국민연금 총액 자체가 고갈되는 것을 예정됐다. 이때 자신들의 시기에 마를 우물에 물을 공급하는 젊은 층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결국 지금부터 심각한 고민을 해야만 미래의 파국을 막을 수 있다. 독립은커녕 세대 간 전쟁을 피할 수 있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