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과 무기력 사이에서 3
지난 삶이 꼭 흑백 영화 같다. 흑과 백만 있고 회색은 없는 영화. 지점토처럼 두 색을 반죽해 회색을 만들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애증(愛憎)은 얼마나 힘든지 모른다. 대립하는 두 가지 감정은 반죽되지 않는 지점토처럼 계속해서 싸운다.
두 가지 마음을 동시에 품는 건 인간에게는 정서적 숙명이기도 하다. 고통을 피할 수 없는 인생의 본질처럼, 이성이 통제할 수 없는 영역에는 어쩔 도리가 없다.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와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이 둘은 애(愛)로 시작해 증(憎)으로 끝난 관계였다.
어려서부터 천재로 불렸던 피카소는 프랑스로 유학을 가지만 무명이었기에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유일하게 그의 그림을 극찬한 사람이 있었는데, 당시 최고의 화가이던 앙리 마티스였다.
야수와 같이 본질을 뚫는 듯 한 마티스의 색채 표현에 피카소는 경이로움을 느끼고 그를 스승으로 삼는다. 둘은 서로의 재능을 누구보다 지지하며 작업을 이어나갔지만 이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피카소가 [아비뇽의 처녀들]로 주목받으며 마티스 그림을 비판하기 시작했고 이들은 대립한다. 서로의 작품을 견제하고 표절 논란을 일삼는 등 한 때의 우정은 완전히 깨져 버린다.
피카소는 자신만의 스타일 큐비즘(입체파)을 확립해 그 입지를 다져갔지만 마티스는 점점 밀려났다. 마티스는 피카소의 큐비즘 작업을 시도해보기까지 했다.
이 둘은 그림만큼이나 성향도 달랐다. 피카소는 스페인 사람답게 열정적으로 직감에 의해 작업했고, 마티스는 신중하고 냉철한 성향으로 정해진 시간에 규칙적으로 작업했다. 맘속으로는 대체 불가능한 서로의 예술적 재능을 동경했지만, 10여 년의 긴 시간 동안 둘의 관계는 변하지 않았다.
피카소와 마티스는 서로의 그림에 영향을 미치면서 그림 전쟁을 이어나갔는데, 후반에서는 상황이 완전히 역전돼 피카소가 미술계의 주목을 휩쓸었다. 이에 마티스의 태도는 이러했다, '피카소와의 공동 전시에서 내 그림이 그의 그림에 묻힐 테니, 피카소 옆에 내 작품을 놓지 말아 달라'라고.
시간이 흐르며 서로를 향한 미움도 점차 사그라들었을까, 피카소는 자신이 맡게 된 12세기 적 성당의 대형 벽화 작업 앞에서 압박을 느끼며, 직전에 방스 성당 벽화를 그렸던 마티스에게 조언을 구하고 싶다며 그를 그리워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은 끝내 예전 사이로 돌아가지 못했고, 피카소가 미술계의 정점을 찍었을 때 마티스는 세상을 떠났다. 피카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비통함에 [캘리포니아 화실]을 그리며 애도했다.
피카소와 마티스의 애증 관계를 발판으로 피카소는 무명의 시기를 거쳐 최고의 화가로 성장했고, 마티스는 야수파 이후 새로운 시도와 반발을 통해 자신의 작품 세계를 견고히 다졌다.
서로를 동경하고 또 미워하며 20세기 미술의 양대산맥을 이루었던 둘을 보며 나의 생각에 다다랐다.
‘증(憎)을 버리지 못해 죄책감을 가지지도 말고, 동경이 무기력으로 또 변모하더라도 괴로워하지 말자’
내 양가감정도 자연스럽게 바라보는 게 어떠냐고, 흑에서 백으로 바꾸려 버거웠던 노력을 내려놓자고 말이다.
여행을 정리하고 있는 요즘, '기억을 정리하는 일은 참 좋은 거구나' 깨닫는다.
김춘수 시인의 시 <꽃>처럼, 아무것도 아니었던 내 기억이 의미를 찾아가고 있다.
ㅡ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히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김춘수, 꽃
ㅡ
‘아, 이 기억이 나한테 그런 의미였구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쓰고 정리하는 과정을 거치며, 스스로에 대해 통합적인 시각이 조금씩 생기는 걸 느낀다.
무기력하게 떠난 유럽에서 예술가들에게 나를 투영하며 마음 한 구석 묘하게 편해졌지만, 쓰기 전에는 그게 무엇인지 알지 못했으니까.
과거의 화가들과 생명력 있는 대화를 나누었던 <동경과 무기력 사이>는 이번 화로 마친다. 동경도 무기력도 모두 그림 재료로 사용했던 그들을 통해, 나를 찾는 여행을 시작할 수 있었다.
내 삶에 찾아온 것들을 더 바라봐주고 '무엇'으로 만들어 줄 수 있을까 고민하고 싶어 졌다.
Lost & Found, 나를 찾는 여행 중입니다 :)
https://brunch.co.kr/@chograss/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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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runch.co.kr/@chograss/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