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팀장은 안할래요.
주말에 친구들이 제주로 놀러 왔었다. 운전을 할 줄 아는 친구들 덕분에 혼자서 가기 어려웠던 제주 서쪽 지역을 마음껏 여행할 수 있었다. 혼자서 즐기는 제주도 좋았지만, 친구들과 함께하는 제주도 그 나름대로 즐거웠다. 제주에 와서 즐기는 순간 순간이 이렇게 좋아도 되나 싶을 정도로 하루 하루가 즐거움으로 가득 찼다. 친구들과 함께하는 제주의 주말이 지나갔다. 그리고 오늘은 월요일, 2박 3일간 함께 했던 친구들이 서울로 돌아가는 날이었다. 친구들과 마지막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나도 오전 반차를 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성산일출봉으로 산책도 가고, 근처 식당에서 해물뚝배기도 먹었다.
"잘 놀다 간다!"
"다들 와 줘서 고마워! 이제 너네들 가면 나 출근해야 해"
"그래도 제주도에 있잖아. 난 니가 부럽다."
"제주에 있어도 월요병은 치유가 안되는 것 같아."
"집에서 고개만 돌리면 성산일출봉이 있으니 즐겨라!"
아쉬운 작별인사와 함께 친구들이 탄 차가 출발했다. 떠나는 친구들이 탄 차를 한참을 보다가 이내 집으로 돌아왔다. 2박 3일동안 왁자지껄했던 집이 순식간에 고요해지니 낯설었다. 그간 제주에 있으며 느끼지 못했던 외로움의 감정을 처음 느끼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감상에 빠질 여유는 없었다. 나는 오후 출근 준비를 해야했다. 청소기를 돌리고, 빨래를 하고, 이부자리 정리를 했다. 부지런히 청소를 끝낸 후 방 한 켠 작은 책상으로 갔다. 마음을 다잡고, 이번주의 일을 시작해야했다. 오늘 나의 목표는, 언제나 늘 그랬듯이 빠른 퇴근이었다. 빨리 퇴근하고 집 근처 슈퍼에 가서 제주 초당옥수수를 사와 먹는게 오늘 나의 유일한 계획이었다.
여느 월요일이나 다름없는 날을 보냈다. 전주 실적을 정리하였고, 주간 회의 자료를 작성하고, 팀 주간 회의를 했다. 월요일은 늘 전쟁같은 하루였다. 미팅 전까지 실적을 정리하고 회의 자료를 작성하면 어느새 미팅 시작 시간이 되었다. 약 1시간 반정도의 주간 회의을 끝내면 언제나 기진맥진이었다. 이번주 한주도 무사히 잘 시작했다는 생각, 힘들었던 월요일도 잘 마무리 했다는 안도의 마음이 들었다. 그 날도 그랬다. 대충 남은 잔업들을 마무리하고, 일찍 퇴근할 생각이었다. 나는 오늘 초당옥수수를 먹어야 했으니까! 그런데…
- 제주도 생활은 어때?
- 너무 좋아요 팀장님. 주말에 친구들 놀러갔다가 오늘 서울 갔어요. 팀장님도 워케이션 한 번 오세요.
- 나도 가고야 싶지~
갑자기 팀장님의 메신저가 왔다. 제주도에서 잘 지내고 있는지, 워케이션은 재밌는지 물어보는 안부 인사였다. 그런데 묘하게 쎄한 느낌이 드는 건 기분탓이었을까? 어딘가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에 나는 동물적인 감각으로 이상함을 캐치했다. 내가 느끼기에 팀장님은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따로 있었지만 다른 이야기만 하며 대화를 뱅뱅 돌리는 기분이었다.
- 그래서, 다른건 아니고… 지현이 혹시 팀장하는거 어떻게 생각해?
- 네…? 팀장이요?!
역시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 예감이 ‘팀장 제안’일 거란 사실까진 몰랐다. 갑자기 팀장이라니, 전혀 예상치 못한 청천벽력같은 소리였다.
- 하반기에 조직개편을 해서 새로운 팀장 선임이 필요판데 지현이가 하면 어떨까 싶었어. 이전 회사에서도 지현이는 파트장 경험도 있었고, 지금도 너무 잘해주고 있으니까 충분히 잘할 거라 생각했는데 지현이 생각은 어때?
- 팀장님 갑자기 팀장이라뇨. 전 절대 못해요…
생각지도 못한 팀장 제안에 당황스러웠는지 내 얼굴은 벌개지고 입술도 바싹바싹 마르기 시작했다. 팀장 제안을 받자마자 난 직감적으로 느꼈다.
‘지현아 도망가!’
나는 나의 직감이 말하는대로 최선을 다해 방어하기 시작했다.
- 저는 아직 팀장을 할 만큼 업무를 숙지하지 못한 것 같아요. 이제 겨우 저한테 주어진 일을 하나씩 쳐내고 하루 하루 제 앞가림 하기 바쁜걸요.
- 그냥 반장 같은 거야. 대단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
- 제가 저희 팀에서 나이도 많고 연차가 제일 높아서 이런 제안을 주신 것 같은데, 사실 저보다 다른 팀원들의 업무 역량이 더 뛰어나서 제가 업무적으로 제대로 가이드를 줄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무엇보다도 저는 제가 뭣모르고 맡았다가 팀을 망칠까봐 겁나요.
정말이었다. 내가 팀을 망칠까 겁이 났다.
팀장님 말대로 나는 이전 회사에서도 파트리더 역할을 했었다. 물론 나 포함 3명뿐인 작은 파트였지만, 나름대로 신입사원도 교육시키고 한창 일해야 하는 대리 친구도 업무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 하지만 그때의 파트리더와 지금의 팀장 제안을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는 없었다. 일단 내 업무 역량에 대한 자신감이 없었고, 팀원들을 이끌며 가이드를 줄 수 있을지도 물음표였다. 내 업무 퍼포먼스에 대해 내 스스로가 의구심이 있었는데, 나에게 팀장 제안이 왔다는게 이해도 안갔다. 그저 내가 물리적으로 나이가 많아서, 연차가 높아서 나에게 오는 제안인 것처럼 느껴졌다.
- 지현이가 나이가 가장 많거나 연차가 많아서 제안한게 아니야. 잘할 수 있다 판단되어서 제안한거지. 그렇지만 본인이 힘들다면 억지로 시킬 생각은 없어.
- 죄송해요. 아직 준비가 안된 것 같아요.
- 그래. 지현이 생각 존중하고,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되었다고 생각하자.
- 네, 팀장님. 이해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짧은 대화가 끝났다. 나는 퇴근을 했다. 노트북을 덮고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해가 지려는지 하늘이 붉은색이었다. 조용한 방 가운데 위잉 하고 울리는 냉장고 소리만 들렸다. 지금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던거지?
‘띵동’
그때 핸드폰으로 메시지가 도착했다.
- 정지은! 잘 놀다 간다! 맛있는 샌드위치 먹고 월요병 퇴치해! 덕분에 잘 놀다 왔다. 너무 고마워!
오늘 아침 제주에서 서울로 돌아간 친구들에게 온 문자였다. 이제 도착했는지 카톡이 잘 도착했다며 덕분에 잘 놀았다고 고맙다는 연락이었다. 맛있는 샌드위치를 사먹으라며 스타벅스 상품권도 보내줬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이었다.
너네가 하루만 더 늦게 돌아갔으면 어땠을까? 나 갑자기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이 생겨버린거 있지?
아무도 없는 공간, 숨막히게 조용한 집에 있으니 유독 공허함과 외로움이 더 크게 느껴졌다. 지금 내가 느끼는 이 기분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예상치 못한 제안을 받았고, 그 제안이 부담스러워 거절을 했다. 감사하게도 팀장님은 나의 생각을 존중해주셨다.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내 마음은 너무 불편했다. 왜 그럴까?
아무래도 안되겠다. 오늘 내가 세웠던 유일한 계획을 실천하러 가야겠다.
신발을 신고, 옥수수를 사러 동네 마트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