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내가 시니어라구요?
"팀장님, 지난번에 말씀주셨던 내년도 마케팅 연간 플랜 정리해봤는데 한 번 피드백 주시겠어요?"
"와 이걸 벌써 다 했어? 대단한데?"
지난주 미팅 때 얘기 된 내년도 마케팅 플랜을 팀장님께 보여드렸더니 이걸 벌써 다 한 것이냐며 만족의 표정을 보이셨다. 당연히 업무 시간 안에 이 모든걸 다 하진 못했고 야근을 했다. 팀장님이 몰랐던 것은 내가 야근까지 하며 이 일을 소화했다는 사실이다. 최근에 퇴근 후 주 1회 나머지 업무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야근 신청을 따로 올리진 않았다. 내가 야근한다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나 혼자 은밀히 했던 것이다. 어린시절 공부 못하는 애들이 학원에 남아 나머지 공부하는 것처럼, 업무 시간에 미처 다 소화하지 못한 업무를 퇴근 후 각잡고 붙잡는 나머지 공부 시간이었다.
사실 나머지 공부는 나에게 울며 겨자먹을 수밖에 없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업무시간에 소화할 수 있으면 제일 좋았겠지만, 아직 손도 느리고 시스템도 익숙하지 않아서 도저히 이 업무까지 챙길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 일과 시간 중 각종 유관부서로부터 오는 메신저 세례는 나를 늘 정신차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메신저가 온 것을 알리는 ‘딩동’소리가 날 때 마다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이었다. 연간 플랜을 세우는 것은 다양한 자료와 전반적인 방향성, 목표를 바탕으로 깊은 고민을 요하는 업무였다. 이런 업무를 정신없는 일과 시간 중에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고민'하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팀장님이 말씀하신 데드라인은 다가오고 있지, 시간은 부족하지, 어떻게 할 방도가 없었던 내가 선택했던게 바로 퇴근 후 나머지 업무 시간이었던 것이다.
왜 야근 신청도 하지 않고 퇴근 후에 자발적으로 일을 한 것일까? 사실 금전적인 보상도 없이 공짜로 노동을 한 시간이었다. 누가 들으면 왜 그렇게 바보같이 일을 하냐 물을 수도 있었다. 아마 나 역시도 내 친구가 공짜 야근을 했다고 말하면 알아주는 사람도 없는데 왜 바보같이 야근 신청도 안하고 일하냐며 ‘정신차려 바보야’를 외쳤을 것이다. 돈도 못받고, 알아주는 사람 한 명도 없는 영양가없는 근무 시간이었으니 말이다. 비록 야근 수당도 받지 못했고, 알아주는 사람도 없었지만 지킬 수 있는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나의 자존심!
사실 이 정도 업무를 일과시간 안에 소화하지도 못할 만큼 지금 일이 벅차고 업무에 허우적대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이 바깥으로 알려지는 것이 창피했다. 나에게는 몇 푼의 야근 수당보다 ‘나는 이 정도 업무는 일과시간 중에 충분히 해결할 수 있어요’라고 말하고 싶은 얄궂은 자존심을 지키는게 더 중요했다. 퇴근 후 나머지 공부 시간은 이직 후 새로운 회사에서 적응하면서 점점 낮아졌던 자존감을 지키고 나를 보호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나머지 공부 시간에 고민하며 작업했던 결과는 다행히 좋은 피드백을 받을 수 있었다. 직장 생활을 8년 넘게 하더라도,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한다는 말은 언제나 진리였다. 지난 밤 남몰래 야근하며 보냈던 시간이 헛되지 않았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생길 줄은 꿈에도 몰랐다.
- 지현아. 이것도 한 번 봐줄 수 있어? 내년도 마케팅 예산 배분이 필요한데 지현이가 1차로 한 번 잡아봐.
- 지현아. 내일 개발 미팅 있는데 어떤 내용 논의하면 좋을지 정리 좀 해줘.
- 지현아. 이것도 좀 해줘.
이번 나머지 공부 시간이 마지막일줄 알았는데, 팀장님은 그 이후로 나에게 다양한 골치아픈 일들을 계속해서 주셨다. 이런 상황을 바랐던 것은 아닌데…주어진 업무를 일과 시간 내에 소화하면 제일 베스트였지만, 아직까지 나의 능력은 부족해서 업무 시간 중 고민이 필요한 업무를 동시에 소화하는게 어려웠다. 그래서 나의 나머지 공부 시간은 점점 더 늘어났고, 어느 순간부터 나는 매주 목요일마다 고정적으로 나머지 공부를 하게 되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 중 나머지 공부를 하기 가장 좋은 날은 목요일이었다. 목요일에 나머지 공부를 하고, 조금은 마음편한 상태로 금요일에 출근하면 꽤나 상쾌한 마무리와 함께 주말을 맞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예산 정리해야 하는데 못했네. 운동하고 와서 자기 전에 딱 한 시간만 보는거야!'
나머지 업무는 항상 운동과 샤워 후 개운한 상태로 시작했다. 산뜻한 마음으로 2차 업무를 시작하자는 나의 마음가짐이었다. 나머지 업무가 공식적인 업무 시간은 아니었으니 좀더 가벼운 마음으로 일하고 싶어 TV를 킬 때도 많았다. 마침 목요일 밤에는 내가 좋아하는 TV프로그램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가 방영되는 날이었던 덕분에, 꼬꼬무는 나의 훌륭한 나머지공부 메이트가 되어 주었다. 사실 오늘의 꼬꼬무 주제는 뭘까 궁금해하며 엑셀을 보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꼬꼬무 속 내용은 귀에 들어오질 않았다. 대신 나는 엑셀과의 한 판 승부를 벌였다. 그 어떤 방해없이 온전히 조용히 업무에만 집중할 수 있는 심야의 나머지 공부 시간이었다.
'다했다! 이제 맘편히 자야지.'
업무를 마무리하고 시계를 보면 항상 1시간 반 이상의 시간이 훌쩍 지났다. 노트북 화면으로 보이는 나의 나머지 공부 결과물을 보면서 느껴지는 뿌듯한 마음은 덤이었다. 어떤 피드백을 받을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다음 날 조금은 덜 찜찜한 기분으로 출근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그렇게 꽤 오랜 시간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나머지 공부 시간이 계속 되었다. 8년의 경력을 가졌고 햇수로 9년차인 직장인이 일과시간에 업무를 다 소화하지 못해서 야심한 시각에 나머지 공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물론 퇴근 후 업무를 하는 것은 당연히 짜증났다. 하지만 나의 자존감을 지킬 수 있기에 기꺼이 감수할 수 있는 시간들이었다. 아무래도 나에겐 야근 수당 몇 푼보다 나의 자존심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했던 것 같다. 남들은 바보같다 생각할게 뻔하지만, 돈보다 내 자존심을 지키는게 나에게 더 중요했던 것을 어떡하리? 비록 공부 못하는 열등생이었지만 나머지 공부로 하루빨리 성장하는 것, 그것이 나의 자존심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