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팀장은 안할래요.
며칠 후 우리 팀은 분리되었고, 새로운 팀장님이 올 것이란 소식도 들었다. 비록 새로운 팀장 체제의 적응은 수고로울지라도, 내가 팀장이 된다는 원치 않는 상황은 피했다. 그래서 갑작스럽다고 생각한 변화도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볼품없는 옥수수 뼈대만 쥐고 울었던 날도 까마득해지고, 제주에서의 워케이션도 점점 그 끝을 향해 달려가는 중이었다. 일주일이 채 남지 않는 시간, 없는 시간을 쥐어 짜서라도 제주를 즐기기엔 모자른 시간이었다. 내가 제주에 있던 말던, 회사는 나에게 계속 일을 줬기 때문이다. 월말이 다가올 수록 아침 8시에 출근해도 저녁 7시 8시까지 일하다 퇴근하는 날이 점점 많아졌다. 점심 시간 겨우 짬내서 동네 산책을 다녀오는 것이 내가 즐길 수 있는 평일 제주의 전부였다.
그날도 정신없이 일을 하는 날이었다. 연이어 있는 줌 회의를 참석하고, 쏟아지는 업무를 쳐내기 바쁜 와중이었다. 같은 팀 동료에게서 메신저가 왔다.
- 지현님! 제주는 어때요?
- 제주도 너-무 좋아요. 오늘 날씨 최고에요.
나는 자랑삼아 집 안 창문으로 보이는 성산일출봉 사진을 찍어서 보냈다.
- 성산일출봉 엄청 잘보이죠? 집에서 바로 보여요.
- 와 진짜 너무 좋다. 지현님 부러워요. 서울은 비오거든요. 저는 지금 집 앞 카페에 나와서 일하는 중인데 지현님 사진 보다 여기 보니 너무 우중충해요.
- 와 그래도 비오는 날 카페에서 일하는거 좋은데요? 나도 카페나 가볼까?
재택근무 덕분에 서울에서도 가끔 답답하거나 일이 안풀릴 때, 한 번씩 집 근처 카페로 나가 일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제주에 와서는 한 번도 실행해보지 못했었다. 집에서도 창문을 통해 잘 보이는 성산일출봉에 만족하면서 집 구석에 쳐 박혀 20일이 넘는 시간동안 성실하게 일만 했다. 집 앞 1분 거리에 엄청난 뷰를 자랑하는 카페가 있었음에도 말이다. 내가 왜 카페에 나가서 일할 생각을 못했지? 팀 동료와의 대화가 마무리 되자 마자 노트북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그때 시간이 오후 5시였다.
집 앞 1분 거리에 있는 카페 프릳츠로 왔다. 길만 건너면 있는 카페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이미 모든 사람들이 제주 성산의 가장 유명한 카페로 프릳츠를 알고 있지만, 내가 워케이션을 갔던 2026년 6월만 해도 이제 막 생겼기 때문에 성산 프릳츠를 아는 사람 자체가 별로 없었다. 우연히 지나가다 들린 사람들만 있는 정도였다. 이 좋은 카페를 한적하게 즐길 수 있는 호사를 이제서야 제대로 누릴 생각을 하다니, 지나간 시간이 아까웠지만 어쩔 도리가 있나? 이제라도 열심히 즐기자는 생각으로 야무지게 아이스 아메리카노 1잔과 간단한 디저트를 주문했다. 그리고 성산일출봉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아 노트북을 켰다. 다시 업무 모드 ON! 예쁘게 차려입은 관광객들 사이에서 슬리퍼 차림의 동네 마실 복장으로 노트북을 하고 있는 내 모습, 꽤 마음에 들었다.
커다랗게 난 통창으로 보이는 성산일출봉의 풍경은, 집 안 작은 창문으로 보이는 성산일출봉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그 장엄한 풍경에 감탄하며 일할 수 있는 순간 순간에 행복을 느꼈다. 제주 워케이션을 와서도 일만 하느라 잠깐 잊고 있었던 여유를 되찾은 기분이었다. 그래, 이게 사람 사는 맛이지! 쌉쌀한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달콤한 디저트가 이 날의 업무시간을 더 즐겁게 해주었다.
하지만 조금만 일찍 나왔으면 좋았을 것을, 아쉽게도 프릳츠의 마감 시간은 오후 6시에 문을 닫았다. 나는 노트북을 펴고 일을 시작한지 한 시간만에 정리하고 밖으로 나올 수 밖에 없었다. 1시간 안에 오늘의 업무를 모두 마무리하고 싶었지만 역시나 그건 무리였나보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한 채 짐을 챙겨 카페 밖을 나오니, 쨍쨍한 해와 살랑살랑 부는 바람의 청량한 여름 날씨가 나를 반겨주었다.
‘어차피 야근해야 되는데, 이대로 집에 들어가긴 아쉬우니, 성산일출봉이나 다녀올까?’
집으로 가려던 발걸음을 돌려 성산일출봉을 향해 가기 시작했다. 내가 좋아하는 바닷길 산책로를 따라 걸어가니, 비록 해야 할 일은 남아 있었지만 마음은 행복했다. 오늘 하루, 1분 1초도 눈코뜰 새 없이 바쁘지 않은게 얼마나 다행인가? 나에게 이런 풍경을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있는 것이 감사했다.
저녁 6시가 넘은 성산일출봉은 평일이었지만 일몰을 보기 위해 모인 관광객들로 꽤 북적였다. 나도 제주 성산의 풍경이 한 눈에 보이는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저 멀리 우도 앞바다까지 보이는 탁 트인 풍경을 보니 그간 신경쓰이고 답답했던 내 마음도 탁 트이는 기분이었다. 잠시 벤치에 앉아 풍경을 감상하다 노트북을 꺼냈다. 이 풍경을 보며 일을 하면 얼마나 좋을까 호기심이 생긴 것이다. 일몰 사진을 찍기 위해 준비하는 관광객들 사이에서 갑자기 벤치에 양반다리로 앉아 노트북을 키는 사람이라니, 나의 이상 행동과 동시에 주변 관광객들의 낯선 시선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 곳에 나를 아는 사람들은 없고, 주변의 시선은 상관없었다. 노트북을 키고 카페에서 하다 남은 업무를 처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 상상 속 낭만과 다르게 오래 일을 하긴 어려웠다. 제주 바람에 노트북 뚜껑이 덜렁덜렁 흔들리는 것이었다. 이러다 노트북 뚜껑이 날라가서 회사 기물을 파손하는게 아닌가 싶은 마음에 나는 서둘러 일을 마무리하고 뚜껑을 덮었다. 오늘 목표로 한 업무를 다 하진 못했지만, 남은 일은 내일의 나에게 미룰 참이었다. 황홀한 일몰이 내 눈앞에 펼쳐지려고 준비하고 있는데, 그깟 일이 나에게 얼마나 중요하겠는가? 나는 퇴근 도장을 찍고, 노트북 가방에 넣은 체 본격적인 경치 감상을 시작했다. 붉은 노을과 함께 성산의 해가 구름 속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래, 내가 원하는 삶은 이런 것이다.
일을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 못지 않게 삶의 여유를 즐기며 하루 하루를 누리는 것도 중요하다. 아니, 사실 이건 일보다 더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일은 내가 내 인생을 즐기며 더 잘 살기 위해 돈을 버는 수 많은 방법 중 하나일 뿐이니까. 회사에서 나에게 부여하는 책임감, 책임을 다 했을 때 얻게 되는 성취, 그때마다 느끼는 보람은 나를 성장시킨다. 하지만 퇴근 후 노을을 바라보며 갖는 나만의 시간과 바꾸고 싶지는 않다.
‘그래, 팀장 거절하길 참 잘했어’
그것은 내 인생을 지키기 위한 거절이었다. 나는 지금과 같은 여유가 너무나 소중한 사람이다. 넘쳐나는 일과 미팅에 함락되어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려가는 내 인생을 눈뜨고 지켜볼 수는 없었다. 나에게 내 인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고, 나는 내 인생도 최선을 다 해서 누려야 할 책임이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 한 켠에 꽁꽁 숨겨져 있던 죄책감을 털어낼 수 있었다.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자리를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