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팀장은 안할래요.
영원할 것만 같았던 한 달간의 제주 워케이션도 끝나고,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서울에 도착함과 동시에 제주 워케이션의 기억은 신기루같이 사라졌다. 제주 앓이를 할 새도 없이, 업무에 치였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제주도에서 성산일출봉을 보며 한 달간 룰루랄라 웃으며 즐겼던 적이 있긴 한 것인지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워케이션 종료와 함께 새로운 팀장님이 오셨다. 내가 팀장을 거절하면서 새롭게 맡게 되신 분이었다. 이전 팀장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우리 팀은 예정대로 2개의 팀으로 분리되었고, 하마터면 내가 맡을 뻔 했던 팀장 자리는 외부에서 새로운 분이 오시면서 채워지게 되었다. 나보다 경력도 훨씬 높고 팀장 경험도 많은 베테랑이었다. 새로운 팀장님의 등장과 함께 나는 그간 나를 괴롭혔던 죄책감도 자연스럽게 지울 수 있었다.
하지만 죄책감은 씻었어도, 넘쳐나는 업무는 여전히 괴로웠다. 일은 점점 더 많아지고, 새로운 팀장님에 대한 적응도 필요했다. 직장인 최고의 스트레스 첫 번째가 이직, 두 번째가 조직장의 변경이라는데 나는 이 두 개를 동시에 겪고 있는 셈이었다. 이제 겨우 적응하나 싶으니 또 다시 새로운 팀장님의 업무 스타일에 익숙해져야 했다. 서울로 돌아와서 제주도에서 있었던 시간을 하나 둘 씩 떠올리며 아련해지려 했던 생각은 사치였다. 나는 전쟁터에 뛰어든 무사처럼 떨어지는 일들을 쳐내느라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다. 내 소중한 저녁 시간에는 야근이라는 불청객이 끼어들고 내 삶은 점점 일에 함락되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실수를 했다.
셋팅해두어야 하는 쿠폰을 깜빡하고 놓쳤다. 그래서 매출에 구멍이 났다. 실수를 하려면 티나지 않는 실수를 하던가, 매출에도 영향이 가는 엄청 표나는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핑계 댈 거리도 없었다. 그냥 내가 까먹고 놓쳐서 생긴 일이었다. 요 며칠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일을 했으니, 그럴만도 하다 싶었다. 하지만 회사는 나의 정신이 제정신으로 박혀있는지 도망갔는지엔 관심이 없다. 잘못을 시인하고 구멍난 매출을 메이크업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난 나의 직장생활 제 1의 철칙, “실수를 했을 땐 즉각 인정하고 상사에게 고백하기”를 실천했다.
"팀장님, 제가 실수를 하나 냈습니다. 제가 쿠폰 생성을 깜빡하여 관련 매출이 감소하였습니다. 쿠폰 미노출에 따른 손실 매출액이 00 정도 됩니다. "
"음… 네. 알겠습니다. 손실 매출액을 보전할 수 있는 방법을 잡아서 알려주세요. 바로 말해줘서 고마워요. "
"네.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앞으로 동일한 실수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팀장님에게 나의 잘못을 고백하고, 내 실수로 발생한 손실 매출을 메꿀 수 있는 추가 프로모션 계획을 잡아 바로 보고했다. 안그래도 요즘 일이 많았는데, 실수가 일을 더 만든 셈이었지만 내 잘못으로 발생한 것이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저 내가 수습 가능한 선에서 벌어졌단 사실을 감사하게 생각해야했다.
팀장님께 의사결정을 받고, 바로 업무를 진행하였다. 잔여기간 목표 주문을 미달하지 않으려면 발 빠른 준비가 필요했다. 여러 유관부서에 양해를 구하여 새로운 프로모션을 빠르게 기획하고, 디자인 수정을 진행하고, 바로 다음날 시작할 수 있도록 오픈 준비를 마쳤다. 이 모든 업무를 마무리하니 벌써 밖은 깜깜해진 상태였다. 메신저를 보니 대부분의 직원들은 이미 퇴근한 상태였고, 나의 메신저만 아직 불이 들어온 상태였다. 나만 아직 일하고 있었단 사실에 씁쓸해하며 퇴근 버튼을 누르고 방을 둘러보는데…
정리되지 않은 이불과 난장판인 침대, 폭탄 맞은 듯한 책상, 그리고 씻지도 않은 몰골에 잠옷 차림의 내 모습이 보였다.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실수를 해서 우울한게 아니었다. 넘쳐나는 일에 휩쓸리고 쫓기듯 산 오늘의 내 모습, 아니 제주에서 돌아와 내내 전쟁같이 싸웠던 7월의 내 일상이 우울했다.
겉잡을 수 없이 다운되는 기분을 방치할 수는 없었다. 하루종일 입고 있던 잠옷 대신 외출복을 갈아 입었다. 정리되지 않은 머리를 가려줄 모자도 푹 눌러썼다. 그리고 밖으로 나왔다. 오늘 처음으로 바깥 공기를 마시는 순간이었다. 늘 퇴근 후에는 집 앞 헬스장으로 운동을 하러 갔는데, 오늘은 밖을 걷고 싶었다. 집 근처 한강으로 나갔다.
핸드폰을 가방에 넣고, 앞만 보고 걸었다. 헬스장에선 런닝머신을 하면서도 핸드폰을 손에 놓지 않고 있었는데, 간만에 핸드폰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시간이었다. 무념무상으로 걷고 싶었지만 잡생각이 뭉게뭉게 떠오르는건 어쩔 수 없었다. 나 왜 이렇게 요즘 쫓기듯 살고 있는 걸까?
제주에서의 나는 휩쓸려 살지 않았다. 일도 하고, 여행도 챙겨야 하는 바쁜 마음이었지만, 두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더 부지런히 계획하고 살았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씻고 집을 정돈하고 8시에 출근해서 일하고, 점심먹고 청소하고 오후 업무하고, 퇴근하고 저녁 산책하고 집에 와서 밥먹고 블로그 일기까지 썼던 부지런한 삶. 이 모든 것을 소화하기 위해 머릿속으로 시간을 계획하며 참 내 인생을 주도적으로 살았던 것 같다. 나에게 없던 새로운 모습이었다.
다시 서울에 오고, 이리 저리 휩쓸리며 사는 내 모습을 보니 씁쓸했다. 지금의 평범한 일상에서도 어떻게 내 인생의 주도권을 놓치지 않고 잘 살 수 있을까? 새로운 숙제를 받은 기분이다. 이 숙제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아직까지는 잘 모르겠다. 일단 내일 아침엔 일어나자마자 침대 정리를 하고, 씻고, 머리도 빗고, 잠옷도 갈아입고 책상에 앉아 출근을 해야겠다. 퇴근했을 때 헝클어진 이불과 잠옷 차림의 내 모습을 다시 보고 싶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