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 사람 최승선 006] 양평군 어른들 감동 최고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
이 문장을 괜히 곱씹었던 때가 있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데, 내가 할 일은 왜 없지?' 그래서 좋은 이모가 되기로 했다. 기회만 있으면, 나도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 필요한 힘을 보태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럴 수 있었던 건 '나는 온 마을의 힘으로 컸는데'라는 일종의 부채감 때문이다. 그 부채감을 표현하는 시의 한 구절을 만났다. "나는 불행 중 수많은 다행으로 자랐다"
누구 한 명도, 결정적인 사건도 없다. '수많은 다행'이 내 인생에 있었을 뿐이다. 수많은 '다행'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하는 어른들이었다. 얻을 것 없이 귀찮고 번거로울 수 있는 일들을 하는 어른들이 내 삶 곳곳에 있었다. 이제 생각해 보면 그들에겐 내가 '저들의' 어른이라는 인식이 있는 것만 같았다.
더운 날 버스 정류장에 앉아 있으면 이따금씩 어떤 차들이 멈춰 서곤 했다. "시내 가니? 탈래?" 그중 한 명이었던 파란 트럭 아저씨가 한 말이 종종 기억난다. '내가 태워주긴 했는데, 다른 사람이 탈래? 물을 땐 타면 안 돼. 이 차도 원래 타면 안 되는 거긴 한데, 그래서 나도 고민이 많았는데, 너무 덥잖아. 그래도 다음엔 타지 마. 괜찮아요~ 해야 돼. 요즘 세상이 흉흉하잖아.'
고등학교 수학여행도 빠질 수 없는 이야기다. 여느 90년대생들과 다르지 않게, 우리 수학여행도 교관들의 잡도리가 함께 했다. 첫 번째 밤 레크리에이션과 장기자랑이 끝난 후 하루종일 우리 가이드를 맡았던 사람은 마이크를 내리고 우리 기강을 잡았다. 워낙 흔한 일이니까, 기억도 안 나고 지루하다 느낄 뿐이었다.
그리고 다음날, 버스에 타니 가이드가 없었다. 담임 선생님이 코스 안내를 해주기 시작했다. 의아하지만 중요한 일은 아니니까 버스에선 자고, 밖에선 떠들다 부장 선생님과 나란히 걷다 물어봤다. '가이드 선생님들은 어디 갔어요?' 선생님은 늘 그렇듯 온화한 표정으로 답하셨다.
'내가 가라 했어. 너희들한테 소리 지르고 욕했다며. 그런 사람들한테 나는 너네 못 맡겨. 그래서 돈 다 줄 테니까 가라 했지. 그리고 선생님들이 어제 밤새 공부해서 직접 가이드해주기로 했는데, 선생님들 잘하시지?' 그때 내 대답과 표정은 기억나지 않는다.
아주 어릴 적 교회 선생님도 못 잊는 이야기. 마을 할머니들의 권유로 동생과 단 둘이 다니게 된 교회에서 나의 첫 번째 반은 초록반이었다. 분명 외향인이었는데, 나 빼고 다 친한 상황에서 지독하게 낯을 가리던 나는 일 년 내내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선생님 옆에 앉아 있었다. 수년에 걸쳐 적응한 후에는 MVP와 달란트왕을 휩쓸며 주일학교를 주름잡았다.
그러다 중고등부가 되자, 지독한 낯가림은 다시 시작됐다. 토요일 찬양단 연습과 집 가는 차 문제로 주말 내내 교회에 있으면서도 겨우 고개나 끄덕일 수 있는 날들이었다. 고난주간에 새벽예배도 개근하지만 당시 유행하던 핸드폰 게임을 하는 언니들에게 '나도 해보고 싶어' 말할 수 없는 날들. 그때 1년 내내 나를 끌고 다니고, 물어봐주고, 챙겨주던 언니가 있다. 공교롭게 초록반 선생님의 딸이었다.
어느덧 조금 낯가림이 풀려 초록반 선생님의 차를 타고 집에 가던 날 내가 제법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그때 같이 타던 선생님의 아들, 나와는 같은 학년이던 친구가 '뭐야, 얘 언제부터 이렇게 말이 많았어'라고 하자 혹시 또 말을 안 할까 싶어 언니와 어머님이 동시에 '말 잘하니까 좋구먼 뭐가 문제야'라는 뉘앙스로 실드를 쳐줬던 기억이 난다. 뭘 물어도 답을 하지 않는 사람에게 몇 달이고 물어보는 사람의 마음을 가끔씩, 가만히 생각해보곤 한다.
갚을 필요 없는 선의라지만, 그 무게를 알아버린 사람은 어디라도 갚아야 홀가분해질 수 있다. 그래서 매주 2012년생 어린이들과 독서모임을 한다. 이 독서모임으로 그들이 똑똑해질 거라고, 내가 그들을 현명하게 만들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지만 그들이 행복하길, 편안하고 좋은 어른이 되길 바랐던 사람이 되어주고 싶어서 매주 시간을 낸다. 내 삶에 그런 어른들이 곳곳에 있었던 것처럼, 나도 그들의 삶에 한 곳을 차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