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집을 떠난 뒤, 또 다른 시간이 시작되었다.
한 달 동안은 K누나 부부네 집에서 샛방살이를 하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새로운 집을 구해 이사를 했다.
어학원에서 만난 친구를 보기 위해
옥토버페스트가 한창이던 뮌헨에도 다녀왔고,
다른 친구들과 함께 고르카네 집에 놀러 갔다가
카누를 타다 물에 빠져 안경을 잃어버리기도 했다.
정신없이 웃고 떠들고 여행을 다니는 나날.
잠시나마 불안도, 걱정도 모두 잊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날들이 이어질수록,
마음 한편에선 불편한 현실이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스페인에서 1년간 어학연수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
대학교에 복학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그중 전반기 6개월은 산세바스티안에서,
후반기 6개월은 안달루시아에서 어학원을 다니기로 되어 있었다.
딱히 깊은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다.
산세바스티안은 살기엔 너무 비쌌고,
남쪽 안달루시아는 그보다 훨씬 저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산세바스티안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지고
친구도 생기고, 도시의 리듬에 스며들다 보니,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아 졌다.
이런 고민 속에서, 6개월간 다녔던 어학원이 끝이 났고
이제는 정말 안달루시아로 떠날 준비를 해야 했다.
지역과 어학원을 한참 찾아보며 계획을 세우던 중,
고르카에게서 연락이 왔다.
“나랑 안도니랑 우리 본가로 놀러 가자. 2박 3일.”
타이밍상 가지 않는 게 맞았다.
당장 짐을 싸고, 새로운 도시로 떠날 채비를 해야 했으니까.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망설임 없이 “갈게”라고 대답했다.
현실을 미뤄두고 싶었다.
그 순간만큼은, 당장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여행만 갔다 오고, 그다음에 안달루시아로 가자.
다녀와서 작별인사도 하고, 짐도 마저 싸고.
그럼 되는 거야.’
스스로를 그렇게 설득하며, 나는 가방을 다시 열었다.
토요일 아침, 안도니와 함께 고르카의 집으로 향했다.
안도니는 나나 고르카보다 나이가 조금 더 많은,
물리치료사로 일하는 친구였다.
나중엔 자주 어울리며 친해졌지만,
처음엔 왠지 거리감이 느껴졌던 다른 친구들과 달리
안도니는 처음부터 자연스럽고 친근하게 다가와 주었다.
스페인어가 서툰 나를 배려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영어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건네주기도 했다.
(물론, 영어로 말해준다고 해서 내가 다 알아들었던 건 아니었다.)
고르카와 인사를 나누고 그의 차에 올라탔다.
우리가 갈 곳은 산세바스티안에서 3시간 떨어진 곳, 오비에도였다.
오비에도에 도착하니 벌써 오후였다.
고르카의 집에 도착하자,
고르카 부모님이 따뜻하게 맞아주셨다.
나를 보시고는
“네가 한국에서 온 초이구나. 반갑다”
하며 밝게 웃으시며 환영해 주셨다.
집은 3층짜리였는데, 마치 작은 대저택처럼 넓고 정갈했다.
고르카의 안내를 받아 3층, 예전에 그의 동생이 쓰던 방으로 올라가 짐을 풀었다.
배가 고팠던 우리는 이내 주방으로 내려갔고,
어머님께서 미리 준비해 두신 식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음식은 여러 가지였지만, 솔직히 지금은 전부 기억나진 않는다.
하지만 단 두 가지, 아스투리아스 지방의 대표적인 전통주인 시드라(sidra),
그리고 바삭하게 튀긴 고기 요리 까초포(cachopo)는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시드라는 영어로 사이더(cider)라고도 불리는,
알코올 도수가 낮고 살짝 새콤한 맛이 일품인 사과주다.
산세바스티안에서도 자주 마셨기에 익숙했지만,
아스투리아스 지방의 시드라는 좀 더 도드라진 단맛과 풍부한 과일향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까초포는 아스투리아스 지방의 전통 요리로,
두 장의 커다란 송아지 고기 사이에 햄과 치즈를 넣고 접은 뒤,
빵가루를 입혀 튀겨낸 묵직한 고기 요리다.
대개는 감자튀김과 야채를 곁들여 나오는데,
무게감도 크고 맛도 강해서 한 접시만으로도 완전한 식사가 된다.
처음 까초포를 보고는,
“이걸 어떻게 다 먹지…” 싶어 잠시 당황했는데
다행히 어머님이 안도니와 반씩 나눠서 덜어주셨다.
원래 느끼한 음식을 잘 못 먹는 편이라
튀김 자체도 평소엔 자주 피하는 편인데,
고기 사이에 햄과 치즈까지 들어가니
첫 입부터 진짜 너무 헤비 하게 느껴졌다.
차려주신 음식이라 남길 수는 없고,
먹다 보니 점점 힘들어져서
결국 케첩을 부탁했다.
접시 위가 거의 케첩 범벅이 될 정도로 뿌려서
겨우겨우 한 접시를 다 먹어냈다.
안도니도 원래 식성이 꽤 좋은 편인데,
그날은 그도 살짝 힘겨워 보였다.
반면 고르카는,
덩치에 걸맞게
까초포 하나를 혼자서 거뜬히 다 해치웠다.
시드라를 몇 잔 들이켜고 나니, 몸이 조금씩 풀리는 게 느껴졌다.
기분 좋은 취기였다. 머릿속이 살짝 둥둥 뜨는 것 같았고,
고르카네 집 마당에 앉아 있자니 햇살도, 바람도 다 포근하게 느껴졌다.
그러다 고르카 아버지가 갑자기 뭔가를 가져오셨다.
커다란 플라스틱 통이었는데, 안엔 크고 작은 사과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이게 시드라에 쓰는 사과야.”
고르카가 통을 들여다보며 설명해 줬다.
그러고는 갑자기 한 손에 사과를 쥐고,
다른 손으로 나를 향해 사과를 던졌다.
“에이~ 취했잖아!” 하고 웃으며 피하려 했는데,
몸이 느려져서 그대로 어깨에 맞았다.
주변에서 안도니와 고르카가 박장대소했다.
그러더니 이번엔 누가 먼저 던지나 놀이가 시작됐고,
우리는 마당에서 한참 동안
사과로 캐치볼 비슷한 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대단한 일은 아니었지만,
시드라에 조금 취한 채로
햇빛 아래에서 실없이 웃던 그 시간이,
이상하게 오래 기억에 남는다.
그렇게 2박 3일의 여행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뒤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안달루시아에도 가고 싶지 않았고,
그렇다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즐겁긴 했다.
하지만 그 즐거움 뒤편엔
마주해야 할 현실에 대한 두려움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딱히 미래가 보이지 않는 전공과 대학.
하고 싶은 일도, 되고 싶은 것도 없는 나 자신.
그 사실이 무엇보다도 무서웠다.
그래서 한국으로 돌아가는 게 싫었다.
돌아가면, 그 무서움을 매일 마주하게 될 것 같아서.
그럼, 여기에 남는다면… 난 뭘 해야 하지?
고민을 해봤지만, 딱히 뾰족한 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이렇게 결론 내렸다.
일단 가지 말자.
그다음엔… 어떻게든 되겠지.
그렇게, 나는 아무런 계획도 없이
산세바스티안에 남게 되었다.
그날의 레시피: 카초포 (Cachopo)
▪ 재료
소고기 슬라이스 4장 (샌드형, 장당 약 120g)
하몽 세라노 또는 훈제햄 4장
슬라이스 치즈 8장 (체더, 에담, 그뤼에르 등)
소금 약간
밀가루 100g
달걀 2개
빵가루 1컵
▪ 만드는 법
1. 소고기 슬라이스를 펼쳐 한 면에 치즈 → 햄 → 치즈를 올린다. 그 위에 고기 한 장을 덮어 샌드위치처럼 접는다.
2. 겉면에 소금을 살짝 뿌려 밑간을 한다.
3. 고기에 밀가루 → 달걀물 → 빵가루 순으로 튀김옷을 입힌다.
4. 넉넉한 식용유를 팬에 두르고 중 약불에서 노릇하게 튀기듯 지진다. 한 면당 약 3~4분씩, 속까지 익도록 천천히 익히는 것이 중요하다.
5. 키친타월에 올려 기름을 빼고, 감자튀김이나 샐러드와 함께 낸다.
▪ 팁
고기 사이에 블루치즈를 얇게 넣으면 더 풍미 깊은 맛을 즐길 수 있다.
고기가 너무 두껍지 않게 해야 속까지 잘 익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