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대가 있는 바닷가 작은 바위산, 송대라 불리는 그곳은 인적이 드문 시간이면 즐겨 찾는 장소였다. 높이는 50미터정도 밖에 안되지만 그 형세는 기암절벽에 비길만 하여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반원모양으로 둥글게 파여 들어온 절벽의 발치부근에는 동해바다가 들어와있다. 절벽에에서 떨어져나간 작은 바위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곳으로 파도가 쉴새 없이 들어왔다 나갔다를 반복한다. 해풍이 샌 날은 파도가 바위에 온 몸을 부딪치며 하얀 포말을 만들어 내려 보기만 해도 아찔하다.
이 아찔한 장광을 가진 송대를 좋아했다. 시골이라 학교도 못가고 취직도 하지 않은 10대 후반의 처녀가 갈 곳이 마땅찮은 때였기도 하지만 갈 때마다 다른 얼굴로 나를 맞아주는 송대가 지루하질 않았다. 오빠 방에 꽂혀있던 소설책을 겨드랑이에 끼곤 점심설겆이를 마치자마자 약속이라도 한 듯 달려갔다. 하는 거라곤 뒹굴거리며 책을 읽다가 멍하게 바다를 바라보는 것이 다였지만 매일 그곳에 갔다.
그러던 어느 초여름 오후, 그늘을 찾아 책을 펴들고 벌러덩 드러눕자 눈부시도록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을 뚫고 빛줄기가 가느다랗게 소나무가지 사이 사이로 흘러내렸다. 강하게 내리 쬐는 빛을 피해 얼굴을 돌리는 순간 짙은 제복을 입은 사람이 나무처럼 서 있었다. 오빠를 찾아 집 안을 수색하던 경찰과 비슷한 옷을 입고 있었다. 송대에 드러누워 빈둥거린 것 밖에는 크게 잘못한 것도 없음에도 제복을 보자마자 가슴이 쉴새 없이 방망이질을 해댔다. 아버지도 안계신데 나까지 경찰이 데리고 가면 집안은 어쩌나 하는 생각에 지은 죄도 생각나지 않은 채 나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다.
-실례가 안된다면 나도 여기 잠시 쉬었다 가면 안될까요?
자신을 보자 무릎부터 꿇는 내가 귀엽다는 듯 호탕하게 웃던 그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시원한 목소리로 앉을 자리를 청했다. 이 곳에 발령받은 지 채 한 달이 안된 경찰이었다. 낯설은 곳이라 어색함이 커 동네 순찰을 핑계삼아 이 곳 저 곳을 돌아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그의 눈에 혼자 있는 내가 띈 것이었다. 누구를 만나러 온 것 같지도 않는데 늘 정해진 시간에 와 한참을 앉았다 가는 것만으로도 타인의 관심을 끌기엔 충분했다. 그렇게 한 주를 관찰했단다. 처음엔 절벽 아래 파도를 뚫어지게 바라봐서 떨어져 죽으려나 싶어 걱정되어 보다가 이후로는 하릴없이 친구없는 동네 처녀의 일상을 엿보는 짓을 하고 말았던 것이다.
호의의 표시인지 사이다와 미군건빵을 내밀었다. 경찰로 인해 힘든 시간을 보냈던 아버지와 오빠의 아픈 기억이 여전히 있던 때라 매몰차게 거절했다. 나의 두려움과 분노를 읽었는 지 치마에 묻은 풀을 털어내며 가려는 나의 소매를 잡고는 여동생 같아 주는 거라며 애써 다시 주었다. 그의 웃는 얼굴에 현해탄을 건넌 오빠가 있었다. 유난히 눈이 크고 웃음이 맑았던 오빠, 그 다정함이 그에게 있었다. 물끄러미 등 뒤에서 나를 보는 시선을 느끼며 숨도 쉬지 않고 달렸다. 처음으로 가족 외의 남자를 만났다.
가슴 속 빈 공간이 보이면 먼저 채우고 난 다음에 사랑을 하라.
혼자만으로 충만할 때 누군가를 사랑하라고 꼭 말해주고 싶다.
연이은 상실은 고스란히 영혼의 빈 자리로 남아 내 안엔 늘 찬 바람이 불고 있었다. 바람이 새차게 불어올라치면 약한 뿌리로 인해 스스로가 뽑혀버릴 것같은 불안함에 뜬 눈으로 밤을 세기도 했다. 그래서 늘 바다를 보러 갔던거다. 쉽게 요동하지 않는 그 묵직함이 너무 안전해보여서.
그를 본 이후로 한동안 송대에 가질 않았다.
하지만 두려움보다 궁금함이 더 커진 초가을 어느 날, 태풍이 온다는 소식에 동네사람들이 집안팎을 단속하느라 분주했다. 이 때쯤이면 절벽에 와서 부딪치는 파도가 장광을 이룬다. 나와 성격이 달라 종일 엄마 옆을 지키는 내성적인 남동생을 앞세워 송대로 향했다. 그즈음 운명적인 상대를 만난 소설 속 주인공을 꿈꾸기도 했던 때라 이 날씨에도 나오면 내 운명의 상대일거라는 황당한 시그널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그 시그널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그 해 가을, 낮엔 송대에서 밤엔 그의 근무지에서 우린 늘 하나였다. 남자를 만나면 무엇을 하는 지도 모르는 순진한 시골처녀의 가슴엔 밤 낮 없이 별이 내리고 꽃잎이 흘날렸다. 사랑이 사람을 이렇게 행복하게 하는 것이라는 걸 처음 깨달았다. 가슴 속 빈 구멍이 가득 메워져 이제 더 이상 외롭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나를 둘러싼 모든 운명적 사건들이 해석이 되었다. 진학을 못한 것도 군대에 못간 것도 결국 이 사랑을 위한 것이라는 소설을 쓰기에 이르렀다.
사랑이 얼마나 사람의 눈을 멀게 하는지, 사랑을 해본 이는 다 알거다.
그렇게 나는 눈이 멀었다. 그저 내 옆에 있는 그만으로 충만했다. 무엇을 궁금해하지도 알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그런 그가 가끔 고향을 갔다 온다며 다녀올 때면 한 가득 짐을 안고 왔다. 정성스럽게 만든 반찬과 깨끗하게 다린 옷가지들이 한가득 있었다. 타향에서 일을 하는 아들을 위한 부모의 지극한 정성으로 보였다. 가끔 연애중임을 아는 언니들에겐 집 안일엔 도통 관심이 없는 엄마와 비교된다며 은근히 자랑하기도 했다.
그를 만나고 첫 봄이 왔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꼭 같이 걷고 싶은 길이 경주에 있다.
멀리 강원도로 시집가던 언니를 보러 형부가 왔을 때 경주에 갔었다. 하얀 벚꽃이 휘날리는 길위에서 곧 결혼할 남녀가 수줍게 서로를 바라보던 모습이 너무 좋았다. 이후 그 길은 나의 로망이 되었다.
지금은 도로가 직선으로 뚤려 애써 가지 않으면 볼 수 없는 추령재의 그 험난한 길을 힘들게 넘어야만 올 수 있는 곳이었지만 그 고생을 해서라도 경주에서 연애를 하고 싶었다. 경주의 봄은 유난히 눈부시다. 길가에 가득 핀 벚꽃이 흩날릴 때면 그 안에 조용히 머무르고 싶어진다. 시간이 이대로 멈추기를 바라면서.
어디를 가자고 먼저 말을 꺼내기엔 너무 순진했었기에 언제나 경주에 가려나 손꼽고 있을 때였다. 봄이 다가기 전에 아니 벚꽃이 지기 전에 가야했기에 은근히 속이 타고 있을 때였다. 사릿문을 밀고 들어와 아침설겆이를 하던 나를 급하게 불러댔다. 경주를 가자고. 그렇게 우린 처음으로 차를 타고 외지로 나갔다.
그와 함께 기억속의 그 길을 걸었다. 연분홍 벚꽃애 눈이 부셨다. 너무 좋아 눈물이 났다. 자연을 좋아하던 그 였기에 나만큼 좋아할거라 여겼다. 하지만 꽃 잎을 손 가득 담아 흩날리는 흉내를 하던 형부와 달리 그는 그저 조용히 땅을 보며걷기만 했다. 유난히 세게 잡은 그의 손때문에 손안에 땀이 흥근해졌다. 그의 불안이 전달되었을까? 이른 아침부터 휴무라며 경주나들이를 가자던 그의 말에 따라나섰지만 엄마의 잔소리를 들을 생각에 나 또한 마음이 편칠 않았다. 게다가 예고도 없이 갑자기 먼 길을 나온 것이 내심 불안했다. 하지만 그를 배려해 내내 어린 아이처럼 즐거워했다. 버스에서 내린 이후 그저 손만 꽉 잡은 채 벚꽃 길을 계속 걷기만 했다. 축축한 손이 불편해 손을 빼려니 놓아주질 않았다.
-나 전근가.
-어디로?
-대구.
그 나이까지 경주를 넘어 다른 곳에 가보질 못했다. 대구는 얼마나 먼곳일 지, 그를 만나려면 나는 어떻게 해야할 지 순간 몇 가지의 질문들이 머릿 속을 빠르게 스쳐갔다.
-나 결혼해.
잡았던 손이 무중력상태에 빠진 것처럼 스르르 풀렸다.
나를 만나기 전 이미 약혼 상태였다. 그제서야 그의 집안 이야기를 들었다. 한번씩 고향을 다녀오면 혼이 다 빠진 듯한 모습으로 짐을 한 가득 갖고 오던 그였다. 몇 차례 부모와 갈등을 빚어가며 파혼을 시도했지만 결국 집안을 이기지 못했다고. 부모를 거역하고 도망치는 연인들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우리도 그래야하나하는 생각이 스쳤다. 순간 전의에 불타올라 그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그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지난 해 여름 나를 설레게 했던 그 눈빛, 따뜻하고 다정했던 오빠의 눈망울이 여전히 그에게 있었다.
'그는 아무 것도 못하겠구나'
그가 떠나는 날, 검은 색 승용차가 관사 앞에 있었다.
하얀 원피스에 검은 머리를 길게 땋은 젊은 여자와 나이든 중년 부인이 함께 왔다.
-아유, 냄새~ 이 바닷가에서 어찌 지냈어? 좀 손을 빨리 썼어야 했는데......
약혼식을 치르자말자 자원해서 바다로 전근을 가버린 아들이 애써 못마땅했던 부모는 결국 다시 고향으로 불러올렸다. 올라가지 않겠다는 아들을 어떻게 설득했는지 나는 모른다. 그는 내게 많은 설명을 하지 않았다. 나 또한 묻질 않았다. 왜 약혼자가 있는데 나를 사랑했냐고 따지지도 않았다.
아버지와 오빠를 잃은 슬픔으로 내 영혼에 깊이 파인 그 공간을 따뜻하게 매워 준 그 기억만으로 그를 온전히 가둬두고 싶었다. 그가 누구와 결혼하는지, 이젠 더 이상 볼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푸른 송대에 누워 함께 노래를 하고 구름떼를 따라 뒹굴던 그 시간 안에서만 그를 기억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