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이와 함께라면 지옥이라도 행복하다고 여겼던 20대의 서툰 욕망이 손가락사이로 흘러내리는 모래처럼 무력하게 빠져나가고 있었다. 어느 날은 물 속으로, 어느 날은 깊은 산 속으로 몸을 던졌다. 낳은 자의 천형인지 엄마는 그 때마다 나를 찾아내 온 영혼이 다 무너진 듯 텅빈 눈망울을 한 딸을 부여잡고 통곡을 했다. 엄마의 비명은 평생을 섬겨온 천지신명에 대한 원망에서 먼저 간 남편에 대한 분노로 이어지면서 결국 자신의 한풀이로 딸의 아픔을 위로했다.
모두가 떠나고 여자 둘 남자 하나가 남은 나의 친정, 아니 나의 집
애초에 나는 시집같은 시집을 가지 않았으니 지금 머무는 곳은 친정 집이 아니라 그냥 집이었다.
막내 딸이 이쁘다고 무등을 태워 동네를 돌았다는 아버지의 손 때가 묻은 그 곳에 오래 살고 싶었다. 지금은 결혼하지 않고 부모와 사는 것이 어색하지않지만 그 때만해도 가문의 수치같은 존재로 여기던 시대였어도 그러고싶었다. 독자인 남동생을 결혼시켜 독립시키고 그 집에서 세상을 한 걸음 뒤 쳐진 상태에서 엄마와 둘이 살리라 마음먹었다.
1년,2년,3년.....
세월은 당황할 새도 없이 나를 향해 걸어오고 영원히 아물 것 같지 않던 상처회복이 나에게서도 일어나고 있었다.
계절이 바뀌며 상에 올라오는 향기나는 나물 내음에 침이 돌았고 마당에 질펀하게 내려앉은 햇빛에서 따뜻함을 느꼈다.
눈을 마주치며 이야기를 걸어오는 이들의 눈빛에서 선량함이, 다시 사람의 손을 마주 잡을 수도 있을 것 같은 용기가 스멀스멀 올라오기시작했다.
바닷물보다 더 짤 것 같은 내 눈물에선 투명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맛난 음식을 먹어도 목이 매이지 않고 그리워도 눈물이 쉬이 터지지 않았다.
새로이 사랑이 시작되었고 내 안에 새 생명이 자라기 시작했다.
가슴설렘도 있었고 우여곡절도 있었지만 사랑에 목매던 서툰 20대는 저물어 가고 엄마가 되어갔다.
딸이 태어났다.
하늘에 감사하고 땅과 바다를 노래했다.
어린 생명을 안고 매일 춤을 추었다.
나에게 다시 온 생명이 너무 감사했다.
두 번 다시 이 딸은 누구에게도 주지 않으리라, 잃지 않으리라 결심하고 또 결심했다.
지난 아픔으로 아이를 붙들지 않고 새로운 희망으로 지켜보리라.
나의 지나온 허물이 아이를 가리지않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딸을 맞이했다.
스스로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어 시간과 운명에 순응하며 살아야했던 무력한 20대는 다시 내 품에서 젖을 빨아대는 어린 생명에서 엄마라는 희망을 길어올리기 시작했다.
자식은 내가 사는 힘이 되었다.
이 아이가 스스로 걸어나가 자신의 운명에 맞서는 그 때까지 그 손을 절대 놓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세상의 손가락질과 잣대에 휘둘리다 무력하게 아이를 잃지 않겠다고
매일 밤 퉁퉁 불은 젖에 얼굴을 묻고 있는 딸을 보며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