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 우리에게 천사가 있었더라면
어느날 오빠가 동네 가게로 데리고 갔다.
좋아하는 과자를 사주며 동생 잘 돌보며 공부 열심히 하고 있으라고 했다.
그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오빠가 사라졌다.
좌익으로 몰려 한동안 경찰을 피해 뒷산에 숨어있다 결국은 고향을 떠나 일본으로 밀항을 했던 것이다.
오빠가 나간 이후로 한동안은 해만 지면 엄마와 문간에 서있었다. 그것도 성에 안차신지 엄마는 큰 길가까지 나가 한참을 서성거리곤 했다. 그즈음부터 집의 대문은 늘 열어두었다.
아버지는 고향을 떠난 오빠소식을 수소문으로 전해듣고 있었다. 부산으로 간 오빠는 밀항선을 탔다. 많은 이들이 그렇게 일본을 들어갈 때였던터라 일본항구에서는 불법입국자에 대한 감시가 심했었다. 오빠는 항구에서 단속하는 순사들을 피해 배가 미처 항구에 정박하기도 전에 차가운 바다로 뛰어내려 헤엄쳐갔다. 이 소식이 아버지가 들은 마지막이다.
-바다에서 태어난 놈이니 지 목숨하나는 건졌겠지.
이 말은 늘 혼잣말처럼 하던 아버지의 간절한 기도였다.
오빠는 이 후 소식이 끊겼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수년이 지나 조총련에 들어갔느니 일본여자와 결혼했느니 하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아들이 일본바다에 뛰어들었다는 말을 들은 이후로 아버지는 많이 변했다. 말수가 확 줄어들고 화가 많아졌다. 평소 가기를 꺼려하던 술판과 노름판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탈출구를 못찾던 아버지의 슬픔과 분노는 노름판에서 결국 큰 화를 불러오고야 말았다.
바다사람들은 고기를 많이 잡으면 잡았다고 술을 마시고 못잡으면 못잡았다고 술을 마셨다. 날씨가 좋으면 좋다고 마시고 굳으면 나쁘다고 마셨다. 술판 뒤에는 늘 노름판도 함께 쌍으로 열렸다. 그 판이 처음에는 기분좋게 시작하다가도 절정에 이를 때면 하루에도 수십번 싸움이 붙고 욕지거리가 오갔다. 그러고도 돌아서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형님아우하며 술잔을 기울였다.
평소 마땅찮게 여기던 동네 선주가 노름판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아버지에게 시비를 걸었다. 결국 아들이 빨갱이였느니 하는 말로 세게 들어오자 안그래도 울고 싶던 아버지는 뺨을 세게 맞은 기분이었다. 크게 싸움이 날 판이었지만 싸움도 해본 놈이 한다. 발 앞에 있는 돌맹이도 세게 걷어차지 못하는 성정인지라 끓어오르는 분을 누른 채 눈만 크게 부라렸다. 그리고는 재수없는 놈이라며 뒤통수를 한대 치고는 그 자리를 피해버렸다.
몇 시간이 안지나 집으로 경찰이 들이닥쳤다. 뒷통수를 맞은 사람 눈 알이 빠졌단다. 그 눈 알을 도로 집어넣고 경찰에 신고를 했다는 것이다. 백가놈이 내 뒤통수를 때려 눈 알이 빠지는 바람에 눈병신이 됐다고. 아버지는 태어나 처음으로 유치장에 갇히고 말았다. 차가운 바닥에 누워 그 바닥보다 더 차가운 겨울바다에 몸을 던진 아들 생각이 나 처음으로 엉엉 울었다고 했다.
국회의원 빽을 써도 좀처럼 합의가 안되었던 그 사고는 배와 땅을 팔아 거액의 합의금을 준 뒤에야 유치장에서 풀려나왔다. 큰 아들의 부재가 그렇게 힘들었을까? 아버지는 이후로 더 말이 없어지고 수척해져갔다. 죽음을 예견이라도 하듯 어린 남동생을 데리고 인근 땅을 둘러보며 다 소작을 맡긴 것이니 잘챙기라는 부탁도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땅은 결국 누군지도 모르는 소작농의 손으로 다 넘어가고 말았다. 이제 열살,열세살된 남매를 보고 힘을 내어주지 못한 아버지가 지금도 너무 원망스럽다.
국민학교를 졸업하는 그 해, 뚜렷한 병명도 없이 시름시름 앓아오던 아버지는 결국 세상을 떠나셨다. 큰 아들의 사진을 품에 꼭 끌어안은 채 나와 남동생을 번갈아보시던 그 눈빛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갓 열살이 된 남동생이 상주를 했다. 형부들이 장례식을 도맡아 했지만 그들은 내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갑자기 과부가 된 성정이 대쪽같던 엄마와 어린 남동생만 내 곁에 남은 것 같았다.
막내동생은 결국 3대독자가 되고 말았다. 큰 아들을 독자로 안만들겠다며 사위를 맞고 난 다음에 낳은 늦둥이었다. 얼굴이 유난히 희고 이목구비가 선명했다. 큰 눈망울에 눈물을 가득머금은 채 상여뒤를 따라가던 모습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온 동네 사람들이 줄을 서 함께 상여를 따라갔다. 어린 내 친구들도 상여를 따라왔다. 상여는 고향 바다와 동네를 휘~ 한바퀴돌더니 산으로 올라갔다. 아들을 보내고 혼자서 수도 없이 올라왔던 그 나즈막한 산, 동해바다밖에는 보이는 것이 없는 곳, 내리 배를 몰고 가면 일본항구에 다다를 것 같은 양지바른 곳에 아버지 묘를 썼다. 모두가 내려가고 남은 그 곳에 동생과 나는 한참을 앉아있었다.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아버지와 큰 오빠의 부재는 사랑하는 이의 상실에서 그치지 않았다. 가정 경제도 함께 무너져내렸다. 불행은 도미노처럼 밀려와 결국 내 삶은 방향을 잃고 말았다. 당연히 중학교진학을 하고 도회지로 나가 멋진 여성이 되어보겠다는 꿈에 부풀어있던 철없는 막내딸로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었다.
처음으로 부엌을 들어가 밥을 짓던 날, 하염없이 울었다. 곁에 없는 아버지와 오빠가 그리워서, 아무런 힘이 되어주지 않는 언니들이 서운해서, 집안의 불행을 굿으로 해결해보려고 재산을 다 탕진하고 있는 엄마가 안쓰러워서, 무엇보다 중학교 진학을 못한 내가 너무 속상해서, 아궁이에 넣은 생가지들이 뿜어내는 연기가 매워서 한동안 부엌만 들어갔다 나오면 눈이 퉁퉁 부어있었다.
사범학교를 나와 우리 학교에 처음 발령을 받아왔던 담임선생님은 상급학교 진학이 어려워진 것에 대해 많이 안타까와하셨다. 엄마는 중학교 진학을 권하는 선생님에게 살림할 사람이 없다며 매물차게 돌려보내셨다. 나도 선생님같은 멋진 여성이 되고 싶었다. 그 선생님을 40이 훨씬 넘어 동기회때 뵈었다. 긴 세월에 초라해진 내 모습을 보이기 싫었지만 선생님이 그리워 달려갔었다. 거칠어진 내 손을 잡은 선생님 눈에는 똑똑하고 이뻤던 어린 내가 아른거렸는지 눈물이 글썽해지셨다. 중학교 진학을 권하러온 선생님을 문 앞에서 냉정하게 돌려보낸 엄마의 표정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 때 선생님도 나를 돕기에는 너무 어리셨다.
인생에는 가정법이 통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때 누군가가 갑자기 큰 슬픔을 당한 우리에게 힘이 되어주었다면, 남은 재산으로 나와 남동생을 공부시키고 엄마가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주었다면 나의 10대는 어땠을까?
그랬다면 늘 자신만만했던 성정이었기에 갑자기 당한 가정의 불행정도는 이겨낼 수 있지 않았을까?
정말 필요할 때 가장 적절한 조언과 지지는 한 사람 혹은 한 가족의 인생방향을 돌려놓을 수도 있다.
우리 모두는 그렇게 누군가에게 뜻밖의 천사가 되어줄 수 있는 기회를 원하면 충분히 가질 수 있다. 단지 그것이 얼마나 가치있는 것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꼭 말해주고 싶다, 나의 자녀들에게.
사랑할 수 있을 때,
도와줄 수 있을 때
네가 천사가 아닌가 착각하는 마음이 들 정도로 마음과 헌신을 다해주라고.
집안의 몰락으로 중학교로의 진학이 막힌 나는 꿈을 잃어버린 채 삐뚤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