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나의 보리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oi Mar 12. 2019

< 나의 보리 >

epi. 29  왓어헤븐







목화솜으로 만든 손수건에 잘 보관되어 있는 듯,보송보송하게

나의 어린 시절의 기억 안에는 미술 선생님들이 계신다.


지금 이야기할 분은 기억 가장 안쪽에 계신 한 분으로.

진주 목걸이가 잘 어울리는 나의 선생님.


당시, 엄마가 다니던 교회 집사님이셨는데,

우리 집 바로 앞동이어서

와다다다 뛰어가 초인종을 누르고 들어간 집사님의 집 거실에서

큰상 하나 펴놓고 과자를 먹으러 온 건지 그림을 그리러 온 건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한 장을 몇 달이고 그렸던 시간들.

몇 달 만에 완성한 그림 한 장에 선생님이랑 춤추고 기뻐했던 그 장면은

내 어린 시절을 만들어준 따뜻한 기억 중에 하나.


내게 어린 시절의 기억은 마치. 오래된 담요 같은 것이다.

추울 때 덮으면 한없이 따뜻하고, 기꺼이 숙면하게 해 주며, 또 더워서 덮지 않더라도 옆에 있으면 든든한 것.






일주일에 하루, 몇 시간.


나도 아이들에게 그림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다.

음..

사실 '가르친다'라는 말은 맞지 않는 것 같다.

나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지 않으므로...

우리는 색으로 선으로, 이런 것들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일을 (병행으로) 업으로 할 만큼 사랑하지만.

뭘 하든 몇 시간 계속하면 체력 게이지가 급으로 떨어지는 나로서는

수업시간이 끝나면

육체적으로 힘이 떨어지는 건 사실이다.

나의 선생님도 그러셨을까.




본능적으로 냉장고로 향한다.

자.. 뭐가 있을까나~

나의 보리와 나는 기대감을 갖고 냉장고 앞에 선다.


나는 알리바바.

"열려라 참깨~"


마술램프의 지니가 내뱉은 오늘의 보물은

푸딩!

커스터드푸딩.


이얏호~

내가 사다 놓은 기억이 없는데, 누군가 사놓았을 커스터드 맛 푸딩을 보니

이것은 지니의 선물처럼 느껴진다.







하나를 손에 집고도 아직 두 개가 더 남았지만

나와 나의 남동생은 요즘도 마지막 남은 케이크 하나, 푸딩 하나, 귤 하나에도 온 맘을 다해 성을 부리곤 한다.

브라더가 퇴근하고 먹기 전에 얼른 먹어야지_라는 마음으로

푸딩을 뜯는다.

묘하게 설렘을 주는 이 커스터드 맛 푸딩은 아주 좋아하는 디저트류중 하나로

뜯을 때부터 이미 먹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급하다.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져 있어서 그런지

나의 손은 뇌를 거치지 않고

아이코! 급한 마음에 포동포동한 푸딩에 그만,, 스푼을..


한 스푼 뜨고 만다.

온전하게 예쁜 모양으로 그릇에 퐁! 담아, 먼저 눈으로 먹는 것은 푸딩의 또 하나의 묘미이거늘

이런 아마추어 같으니라고


한 스푼의 행복.

아름답다거나, 감동한다거나, 마음이 동하면

내 눈썹은 자주 여덟 팔(八) 자가 되곤 하는데

푸딩에 또 여덟 팔(八) 자가 되었다.



푸딩의 등장. 

"안녕?"


안녕하다마다요~




냉장고 앞에서의 찰나의 행복을 느끼곤,

접시에 담아 나와 나의 보리는 거실로 온다.

식탁에 앉아 먹기보다는

이렇게 이불 위에서 먹는 게 더 좋다.

나의 보리도 이 포동포동한 푸딩이 먹고 싶겠지만.

쓰담쓰담으로 대체한다.

아이쁘다~

나의 보리 아~예쁘다~~~~


요즘 들어 나의 보리는 나의 간식 앞에서 찡찡거림이 줄어들었다.

정말 먹을 것마다 옆에서 다양한 목소리로 끈질기게 찡찡 울었는데.

요즘엔 찡찡을 시도하다가도, 내가 이내 쓰담쓰담을 하면

찡찡을 애쓰기도 싫다는 듯

찡찡의 연기를 그만둔다.

찡찡의 연기는 내 앞에서 안 통하는 것이다.



what a heaven!

천국이네.

지금 나는 천국에 있다.

해야할 일을 마치고 조용해진 집안에서.

폭폭한 이불과 커스터드 맛 푸딩과 나의 보리의 이마.


앗. 눈을 마주치면 아직은 다시 찡찡거리기 연기를 시도하려 한다.

나의 보리도 

함께 푸딩 하나씩 들고 딱 뜯어서 함께 떠먹으면 얼마나 좋을까.

정말 맛있는데..


내 접시 위의 푸딩은. 어느새라고 할 것도 없이.

한입 조금이 남아있다.

한걸음 조금 안되게 떨어져 앉은 나의 보리.

얼마 안 남은 것도 알고 그 얼마 안 남은걸 자기한테 주지 않으리라는 것도 아는 것이다.

한걸음 조금 안되게 떨어져 앉은 보리가 순간 되게 많이 멀리 떨어져 앉은 것 같이 느껴진다.


에잇! 함께 먹지 못하는 푸딩. 얼른 입안으로 넣어 없애 버려야지.

혼자 다 먹은 푸딩 하나.

혼자 다 먹어 조금은 미안한 마음 하나.


칫. 그렇다고 그렇게 옆으로 뚝 떨어져 앉기요?



네가 떨어져 앉아도

내가 붙어 앉으면 된다.








_나의 보리는 시시때때로 내가 많이 귀찮을 것이요.

매거진의 이전글 < 나의 보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