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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나의 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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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oi Mar 03. 2019

< 나의 보리>

epi. 28  어쩌다 마주친 그대





아침에 마시는 커피가 

제일로 맛있다.


슬프게도 요즘에 느끼는 미세먼지는 '아 봄이 왔구나'를 느끼게 해 주었고,

맑은 하늘을 본지가 언제였더라..

우린 이미 너무 큰 것을 잃은 느낌이 드는 아침이었다.


정말 날이 많이 풀렸다.

우리 집 창가에서 바라본 

버드 송이들은 언제 저리 통통하게 올라왔는지

창밖의 나무들은 이미 벌써 봄인듯하다.

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과거엔 분명 봄이라는 말에 무작정 설레고 끝없이 환하고 

새로 태어난 새끼 강아지처럼 마냥 뛰어다니던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의 나는 몇 가지 이유로 봄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고작 몇 가지의 싫음이 생겨, 전체를 싫어하게 되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었다.


또 모르는 일이다. 

몇 년 뒤의 나는 또 몇 가지의 좋음으로 봄을 최고로 사랑하는 내가 될지.


그렇게 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동안 이런저런 생각이 짧게 짧게 스쳐 지나가는 아침이었다.

여기엔 봄이 내게 가져다주는 몇 가지의 기억이 있었다.



나의 보리와 처음 만났을 시절.


패딩을 벗어 장롱에 넣어버리기엔 춥고,

계속 입기엔 나 혼자 아직 겨울에 있는 느낌을 주는 이 무렵의 옛 기억이다.









2009년. 

겨울과 봄의 사이.


때는 바야흐로 10년 전..

2009년의 영(young)한 나는 뱅헤어를 고집했고,

닥터마틴의 부츠를 사랑했었다.

_많이

데낄라를 마시면 신이났고, 한밤중에 택시를 타도 지갑이 헐렁하지않았다.

첫 반려견 나의 토니가 세상을 떠난 지 5년이 되던 해였고,

집에 도둑이 들어 가져 갈 것도 없는 집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나간 해였다.

토니의 흔적은 희미해져 갔고, 집에 혼자 있는 건 무서웠다.


'어느 날'

집에서 너무 가까이 있어서 쉽게 찾게 되는 홈플로 시장을 보러 나온 보통의 어느 때와 같던 어느 날.

첫 화에서 썼듯. 홈플 지하 1층엔 동물병원이 있다.

에스컬레이터 바로 옆에 쇼윈도가 있어 오가며 귀염 터지는 강아지들을 볼 수가 있는 구조였고

그때까지의 나는 나의 토니의 죽음 이후로 절대 개를 키우고 싶지 않았고

쇼윈도 쪽으로 눈길을 줄 수가 없어 에스컬레이터 끝무렵엔 다다다다 뛰어서 

순식간에 동물병원 쪽을 휙! 지나가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천천히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려.

강아지들을 보았다.

똥꼬 발랄한 귀염 터지는 아기천사들을 '보고'싶었다.

'아... 정말 사랑스럽구나..'


아기 강아지들은 곧 청소년강아지로 청소년강아지는 곧 어른개로 어른개는 곧 할아버지개로 할아버지개는 정말 할아버지로.. .

가족이 되는 건... 사랑스러움만이 아닌,,,

긴 시간을 함께 보내는 건 행복하게 서로 치유받고 또 아픔을, 죽음을 지켜봐야 한다는것을 의미함을,

2009년의 나는, 아는 나였다.


그런데 그날의 나는 강아지들을 보고 싶었다. 그냥 눈으로만.

"실례합니다~아기들 그냥 봐도 될까요"

"그럼요~ 들어오세요~"


동물병원의 언니의 미소는 친절해서 조급하지 않은 마음으로 들어갔다.

아~~~~ 세상에나~~~

안뇽~~~

왜 때문인지 귀여움을 마주하면 나의 입술은 세상 동그랗게 발음하려 든다..


"이쪽으로 들어와 보실래요??"

"아녜요~~~ 괜찮아요"


"안쪽까지 들어와서 보세요~

상담 한번 받아보실래요?"


"아뇨~~~~ 괜찮아요"


상냥한 미소의 언니의 자연스러운 유도에 깜짝 놀랐지만. 거기에 넘어갈 내가 아니지.

나는 다시 한번 강하게 선을 그었다.

"아니에요~아녜요~~ 전 개를 키울 마음이 없어요~"


그때.

나도 모르게 동물병원 안쪽  깊숙이 들어왔음을 알았을 그때.

작은 병원의 작은 로비 한쪽 구석에 쳐져있는 철창이 눈이 들어왔다.

........ 이 아이는 뭐예요....? 주인이 잠시 맡겨놓은 아이인가요...?


철창 앞에 무심하게 프린트되어 붙어있던 A4용지..

세일..

할인..




그렇다.

나의 보리는 병원에 온 지 6개월이 지나도록 반려인을 만나지 못했던 개로.

쇼윈도 자리에 자내기에 몸이 커버려서 바닥으로 내려왔던 것.

병원 측에서 1,2 차 접종까지 다 해 준 상태였고,

일주일 전 한번 분양되었다가 어인 이유로 다시 병원으로 되돌아왔던 파양견이었다.


아무리그래도...

세일이라니...

너무나 대놓고 

쎄일!이라니..



......


나는 너를 봤고


너는 나를 보고..


나는 더이상 개를키울생각이 없고,

나는 너를 계속 봤고




너도 나를 계속 봤지.



이 아이한테는 나밖에 없겠다 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고.


결정!

이아이 제가 데려갈게요


이것은 충동이 아닌 직관 같은것.

"갑자기...ㅎㅎ 손님 ~이 아이는 한번 분양되었다 돌아왔어요

신중히 생각해 주셔야 해요"


"지금 데려가시면 다시 데려오시면 안돼요"

"...... 네! 그럼요.당연하죠."



세일이라는 말도 안 되는 A4지 붙여놓고는 

이 아이를 세상 잘 생각해주는 척하면서 내가 어떤 사람인줄도 모르고 5분전까지만해도 개키울 생각없다는 사람인 내가 하는 잘 키울거란말을 철썩같이 믿고

곧바로 결제기를 들고 내게온,,이여자...

신중히 생각해달라는 주의의 말이 

물론 진심일지도 모르고 많은것이 어쩔수 없는일임을 알지만서도

나는 이곳이 너무 싫었다.


자~이리온, "빨리"우리 집에 가자 아가.


우리의 첫 접촉.

이날이 우리의 첫날.

나의 보리와 만난 그날부터

내 머리 위엔 무지개가 생겼다.


세상이 무섭고, 짜증나는 일 투성이로 가득찬 내 머리 위에  

나의 보리가 무지개를 만들어 주었다.


"나는 보람이야. 최보람.

나랑 같이 살게되어서 너는 어떨지 잘 모르겠다.


나는 보라색을 제일 좋아해.

음....

아가 너는 아이보리 색깔이니까 아이는 그렇고,,아보..도 좀 그렇고,,,보리 할래?



에스컬레이터를 올라오며 나의 보리 이름이 결정되었다.



나의 보리를 집으로 데려온 그날 밤.


겨울과 봄 사이의 공기 냄새를 기억한다.

전기장판을 틀지 않았지만 두꺼운 이불을 덮었었다.

이불 위로 올라온 내 어깨는 소름이 조금 올라올 정도였지만

내 턱밑은 보들보들 너무 따뜻했다.



이곳저곳을 쓸고 돌아댕기는 '네가' 우리 집에

다시 생길 줄 몰랐다.

역시 다짐한다고 다짐되는 것도 아니고 계획한다고 지켜지는 게 아니다.







내가 나의보리의 좋은 가족인지, 이 아이를 잘 케어해주는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해서 우리집에 온게 나의보리 에게 과연 잘된일이라고는 말할수없겠지만.


이렇게 내다리에 따뜻한 턱을 괴고 잠을자는 너를 보면 

'뭐 이정도면 괜찮지? ,너나나나 ..'하는 생각을 한다.ㅎㅎ


한번 결정 내리기 힘들고 느린 내가.

단지 그 짧은 눈 마주침에 아주 빠르게 결정 내린 그날은.

지금 생각해도 정말 신묘한 순간이었다


이렇게 어쩌다 만난 우리가 가족이 된건,,,연(緣)이라는거겠지..



나의 보리가 만들어준 내 머리 위의 무지개는 아직 건재하다.

그 무지개 덕분에 쓰게 된 <나의보리>.

이 엉망진창인 글을 쓰면서 나 스스로가 너무 행복하다.


10년.

보내온시간을 우리는 함께 보냈고,

앞으로 우리가 함께 보내게 될 날들에 치어스! 





_우리의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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