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의 도로의 신비]
“그럼 쌀국수?”
공부하듯 나를 만나던 예전 남자 친구가 꺼낸 마지막 무기였다. ‘아무거나’를 피하기 위해, 이탈리아와 일본, 터키 등 나라를 오가며 점심 메뉴를 고르던 중이었다. 입꼬리가 사악 올라갔다. 쌀국수는 아침, 점심, 저녁 심지어 해장용으로 먹어도 그만인 음식이었다. 절인 양파와 한국인 입맛에 맞게 개량한 달짝지근한 국물을 생각하면 속이 편해진다. 사실 지겹지만 너를 위해서 먹는다, 고 그가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주중에 3번째 쌀국수를 먹고, 4번째 쌀국수 가게로 향하던 길이었다.
지금까지 프렌즈는 20번, 모던 패밀리는 10번 그리고 최근에 나온 그레이스 앤 프랭키는 4번 정도 봤다. 물론 전 시즌을 말이다. 무한도전은 고등학생 때부터 봤으니까 이미 30번은 넘게 돌려본 것 같다(무모한 도전과 게스트가 나온 편은 되도록 제외하고). 그해 여름부터 가을가지 꽂힌 곡은 3개였다. Let’s fall in love for the night, Mystery of Love, kiss me more. 바다를 가든, 오름을 가든, 시내로 나가든 차에선 항상 저 3곡 중 하나가 흘러나왔다. 동생이 제발 다른 노래, (이왕이면 한국 노래)를 듣자고 애원할 정도로. 꽤 집요한 나는 듣는 걸론 성이 안찼다. 그래, 시간도 많으니 연습해보자!
집에 기타와 우쿨렐레, 피아노가 있지만 아무래도 제일 손이 많이 가는 건 우쿨렐레다. 손끝이 덜 찢어질 것 같고 어디든 가져갈 수 있어서다. 오랜만에 잡은 우쿨렐레엔 먼지가 얕게 앉았다. 물티슈로 줄 사이사이를 닦았다. 튜닝도 검색을 하며 해야 할 정도로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우쿨렐레용으로 쉽게 편곡된 3곡을 유튜브에서 찾았다. 이게 진짜 쉬운 버전인지 몇 번씩 돌려봤다. 손가락이 얼얼했지만 재밌었다. 쉬우니까 금방금방 성과가 나왔다. 즉각적인 결과만큼 중독적인 건 드물다. 이젠 집에서까지 같은 노래를 (게다가 더 엉성한 연주로!) 듣게 된 가족들은 한동안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신비네 앞엔 오픈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카페가 있다. 야외 벤치와 테이블도 있어 손님들이 밖에서 커피를 마실 수 있었다. 카페 주변에선 안팎으로 노래가 들렸다. 어떤 날은 피아노로 연주하는 가요가, 어떨 땐 인디음악이 종일 재생됐다. 선곡은 사장님 마음인 것 같았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흥얼거리며 우쿨렐레를 튕길 수 있을 만큼 실력이 늘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신비네 가족에게 내가 연습한 노래를 들려줘야지. 나름 관광지라(신비의 도로) 사람들이 이따금씩 시동을 끄고 차를 굴려보고 카페 사장님과 이미 안면을 텄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을 것이었다.
해가 지기 전, 신비네 코앞 아스팔트 바닥에 도로를 등지고 앉았다. 우쿨렐레 줄을 튕겨보았다. 내 생에 첫 버스킹이다, 후! 신비가 소리도 없이 옆에 앉아서 꼬리를 자신의 발등 위에 올렸다. 아가들은 안에서 힐끔힐끔 밖을 쳐다보았다. 자, 얘들아. 너희가 첫 번째 관객이야. 잘 들어주길 바라. 톡톡톡 톡 툭(퍼커션 중), let’s fall in love for the night… 아이들이 가게 구석으로 몸을 움츠렸다. 아? 별로야? 그래 박자가 좀 빠르지. 그럼 123123123(주법 중) 오 투 씨… 신비가 등을 돌렸다. can you kiss me more… 신비가 자리를 떴다. 그래, 하지 마. 안 해.
6마리 고양이가 키 순서대로 나란히 앉아 꼬리로 박자를 맞추는 상상을 했는데, 기대가 컸다. 이따금 손끝이 아파 우쿨렐레를 내려놓으면 신비나 명수가 와서 킁킁거렸다. 입을 삐쭉거렸으니 사람이었으면 내가 얼마나 삐쳤는지 눈치챘겠지만 이들은 고양이었다. 그래, 그만 삐쭉대고 나를 위해 연주하자. 1시간 동안 3곡을 되는대로 연주했다. 끝까지 연주한 곡은 없었다. 뒤로 열 명이 채 안 되는 사람들이 오갔다. 한동안 움직이지 않으니 재석이와 명수가 가게 주변을 탐색했다. 엎드린 신비의 그림자가 모로 길어졌다. 쪽빛 수채화 같은 바다가 저 멀리 보이고, 왼편으로 오렌지 빛 해가 저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