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의 도로의 신비]
육지에선 아파트에 살았다. 분리수거를 하는 일요일이면 단지 앞이 재활용품과 사람으로 복작거렸다. 제주도는 분리수거를 클린하우스에서 한다. 클린하우스는 재활용품과 일반 쓰레기를 버리는 일종의 공용 쓰레기장이다. 규모가 좀 있어서 관리자가 상주하는 곳도 있지만 무인 크린하우스가 대다수다. 이게 근처에 있느냐 없느냐 삶의 질을 좌우하는 꽤 중요한 요소다. 클세권, 이라고나 할까. 자칫하다간 분리수거를 하러 쓰레기를 잔뜩 차에 싣고 가야 하는 수가 있기 때문. 사람이 있는 곳에 클린하우스가 생기기도 하지만, 클린하우스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이기도 한다. 우리 동네 클린하우스는 신비네 맞은편에 있었다.
우리들은 주로 밤에 만났다. 꽉 찬 쓰레기봉투를 양손에 들고 온 이웃 주민과 신비네 맞은편 카페 사장님, 야간 오름 투어를 하려고 집합 장소에 모인 관광객들 말이다. 폐점 옆 가로등에 의지한 채 카샤카샤를 흔들고 있을 때, 재석이가 농업용 비닐 사이로 고개를 빼꼼 내밀 때, 신비가 궁디팡팡 해달라고 똥꼬를 보여줄 때, 그들은 쪼그려 앉아있는 내 옆으로 와 고양이들에게 말을 걸었다.
관광객
아침에 신비네 앞에 앉아 있다 보면, 굳이, 이 산속까지 오는 관광객이 있었다. 신비의 도로를 체험하기 위해서다. 사실 도로엔 신비의 도로라고 새겨진 커다란 바위만 놓여있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신비의’ 도로인지 가늠할 수 없어 사람들은 자주 내게 물었다. 그럴 때마다, 위로 가셔서 내려오면 되는데, 막 드라마틱하게 올라가는 것처럼 안 느껴지더라고요,라고 말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사람들은 굳이 위로 올라가 자동차 기어를 N에 맞췄다. 역시, 별 차이 없죠? 저도 그랬어요. 5분도 안돼 자동차는 사라졌다.
밤엔 야간 오름 트래킹을 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의 집합 장소로 분했다. 신비네 옆으로 꽤 넓은 공터가 있어 주차가 용이한 탓이다. 이 관광객들의 연령대는 20-40대 정도로 신비의 도로 관광객보다 연령대가 낮았다. 그래선지 신비를 발견하면 아이처럼 신기해했다. 그럴 때마다 신비는 팔자 좋은 고양이의 전형이 바로 나라는 듯 선선한 바람을 만끽하며 옆으로 누워 앞발을 핥았다. 낯선 사람 앞에서도 편한 엄마를 본 뒤에야, 아이들은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그 찰나를 놓치지 않은 관광객들만이 새끼는 나오지 않는다고 아쉬워했다.
우리의 신비는 낯을 가리지 않는 편이었다. 젊은 여성이, 고양이다, 귀여워! 하는 소리에도 놀라지 않는다. 처음 보는 오빠한테도 궁둥이를 쉽게 내준다. 기분 좋으면 벌러덩 배를 보이며 눕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안에서 약간의 질투와 염려가 한 뼘씩 자라나는 걸 느꼈다. 나쁜 뇬. 밥은 내가 주고 사랑도 내가 더 많이 할 텐데 나한테만 재롱부리지 엉엉. 커져가는 질투심과 달리 키우시는 고양이예요? 하고 물으면, 아뇨, 하고 답했다. 동시에 저러다 악한 사람에게 해코지라도 당하면 어떡하나 걱정도 되었다. 세상에 착한 사람이 태반이지만 드물게 일어나는 악행의 여파는 생각보다 크다. 동물을 대상으로 한 범죄가 커져가고 있는 실정이니 신비 가족과 친해지면서도 마음이 무거워졌다.
412동 안경 가족
“어머~ 여기 고양이가 있네!”
하늘에서 비가 스프레이처럼 흩뿌리던 밤이었다. 풍채 좋은 남성이 골프 우산을 접고 있는 동안, 짧은 단발 엄마와 허리까지 내려오는 기다란 머리를 질끈 묶은 고등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딸이 내게 다가왔다. 막 쓰레기를 버리고 돌아가려던 참인 것 같았다. 모두 안경을 쓰고 함께 쓰레기를 버리러 나온 단란해 보이는 가족.
나: 네, 여기 가족이 살고 있어요! (궁디팡팡중인 신비를 슬쩍 보며) 얘가 엄마예요.
딸: (재석이를 발견하고) 아구, 양말 신었네
엄마: (신비를 보며) 어? 얘 우리 또리(가명. 실명 기억 안 남)랑 닮지 않았니?
딸: 그러네, 얘 애긴가보다.
엄마: 애기 몇 마리나 있어요?
나: 저번에 세어 보니까 6마리 있더라고요.
엄마: 어머~ 진짜요? 그럼 7마리 낳은 건가?
나: 고양이가 있으세요?
한 달 전쯤인가? 쓰레기를 버리다가 소리가 들리길래 봤더니 눈도 못 뜬 애기가 카페 마당에 있더라, 처음엔 걱정돼서 집으로 데려왔다가 엄마 고양이가 찾을 수 있대서 다시 갖다 놨는데 밤에 보니까 애기 혼자 거기 있더라, 비는 계속 오는데 아무래도 안 되겠어서 데려와서 키우고 있다, 고 엄마처럼 보이는 여성이 말했다. 어디선가 고양이는 최대 6마리만 낳는다고 들었다. 다른 엄마 고양이가 잃어버린 다른 아기겠지, 7마리는 너무 많잖아, 생각했다.
딸: (재석이를 보며) 엄마, 얘 너무 귀엽다.
엄마: 한 마리 더 키울까? (아빠를 슬쩍 본다)
아빠: (황급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안돼, 안돼. 너무 많아.
알고 보니 이 가족은 강아지도 키우고 있었다. 모녀의 은근한 애교에도 아빠는 더 이상 동물은 안된다고 딱 잘라 말했다. 좋은 분들인 것 같은데, 길냥이로 지내면 고달플 텐데, 나는 곧 이사 가는데. 즉석 입양이 무산돼 괜히 아쉬웠다. 몇 분 더 담소를 나누고 우린 서로 몇 동에 사는지 교환했다. 그들은 바로 앞 대각선 위치에 살았다. 412동, 412동. 선하고 동물을 키우는 안경 쓴 가족. 혹시 도움이 필요할 수도 있으니까 외워놨다.
카페 사장
오전 10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신비네 집에서는 이름 모를 피아노곡과 국내 인디 밴드의 노래를 들을 수 있다. 바로 앞에 새로 생긴 카페가 10시 오픈 10시 마감이기 때문이다. 매일 밥을 챙겨주다 보니, 나는 어느덧 카페 사장님과 목례를 하는 사이가 되었다. 카페를 방문한 적이 손에 꼽지만 사장님은 나를 꼬박꼬박 고객님이라고 불렀다. 오늘도 오셨네요 고객님?, 고객님 늦었는데 안 들어가세요?, 고객님 안녕히 계세요, 와 같이. 조금 빨리 신비네로 놀러 간 어느 오후, 나는 사장님과 좀 더 긴 대화를 나누었다.
사장: 정말 매일 나오시네요.
나: (멋쩍어하며) 아, 네. 귀여워서요.
사장: 직원들이랑 오늘도 나오셨네 하면서 신기해했어요.
나: (부끄러운 듯) 아, 네…
사장: (카페 앞마당을 가리키며) 쟤네 원래 저기 창고에 있었어요.
나: (눈을 크게 뜨며) 아, 진짜요?
사장: 네, 저기서 아기를 낳은 것 같더라고요.
나: (생각에 잠긴 듯) 그렇구나…
사장: 카페 공사 시작하곤 없어졌더라고요. 사람 왔다 갔다 하고, 시끄러워서. 그날 비가 많이 와서 걱정했는데, (웃으며) 이사했네요.
그제야 퍼즐이 맞춰진 듯했다. 그렇구나, 412동의 또리는 신비의 아이였구나. 신비는 산속에서 애를 일곱이나 낳은 것이구나. 운 좋게 그 아이는 또리란 이름으로 따뜻한 집에서 강아지 언니(혹은 오빠)랑 살고 있구나. 신비도 다행히 비를 피할 수 있는 새집을 찾았구나. 다행이다.
사장님은 혹시 자신의 고양이를 보게 되면 말해달라고 덧붙였다. 어느 날 누가 버린 듯한 품종묘가 카페 앞에 있어 키우기 시작한 아이라고 했다. 외출 후엔 꼭 집에 왔는데, 요 며칠 안 들어온 지 오래되었다고. 이름을 물었더니 블랙이라고. 회색빛 장모종에게 왜 블랙이라는 이름을 붙였는지는 의아했다만, 블랙이를 보면 나는 사장님께 알려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108동 아저씨
열흘에 한 번은 수컷 치즈 고양이를 만났다. 신비네 밥을 채워주고 놀다 보면 아기처럼 우는 소리가 저 멀리서 커져왔다. 스윽 보면 수컷 치즈냥이 카페에 숨어 내가 언제 자리를 뜨나 지켜보곤, 몰래 신비네로 들어갔다. 신비는 치즈냥이 자기 집에 들어와 밥을 먹는 걸 알면서도 아무렇지 않았다. 아무래도 남편인가 보다 싶었지만 나는 치즈냥이 아주 얄미웠다. 단단한 볼따구를 보니 이 동네 대장냥인 것 같은데, 사냥 꽤나 할 것 같은 녀석이 애가 여섯이나 딸린 아내 밥을 빼앗아 먹다니! 녀석의 근거지를 알아내기 위해 벼르고 있었다.
드디어 때가 왔다. 치즈냥이가 신비네 밥을 먹고 돌아가는 찰나, 녀석의 뒤를 밟았다. 내가 쫓아오는 걸 알아챈 녀석의 발걸음은 더욱 빨라졌다. 어라? 근데 우리 집 근처로 가는 것이 아닌가? 어느덧 바로 윗 단지까지 도착했고, 치즈냥은 차 밑으로 쏙 숨어버렸다. 차 밑을 샅샅이 뒤지며 녀석을 찾자 쓰레기를 들고 있던 한 중년 남성이 말리듯 내게 말을 걸었다.
남성: (불러 세우듯) 고양이 찾으세요?
나: (치즈냥이를 찾으며) 네, 쟤가 자꾸 밥을 뺏어먹어서요!
남성: 아, 쟤 여기 사는 고양인데, 밥 주는 데 있는데 왜 그럴까~
나: 그죠! 쟤 밥 잘 먹죠!
남성: (근처 집들을 가리키며) 저기도 주고, 저기도 주는데…
그 사이 노련한 녀석은 사라지고 없었다. 우리 윗 단지에 산다는 아저씨에 의하면 노란 고양이는 여기 산 지 오래된 대장 고양이고 밥을 아주 잘 얻어먹고 있단다. 얻어먹는 애치고는 배고파 보이던데. 그래, 녀석을 찾아도 할 수 있는 건 잔소리밖에 없다 싶어, 터덜 터덜 신비네로 돌아왔다.
조랭이떡 같은 아가들과 놀고 신비의 궁둥이를 통통 두들겨주며 분을 풀던 중, 재석이 털이 눈에 띄었다. 가만히 보니 노란색이 섞여있었다. 명수는 까망 젤리를 가진 완벽 고등어여서 몰랐는데 아무래도 저 대장냥이 남편이구나, 확신이 들었다. 긴 한 숨. 앞으로 사료를 넘치게 채워주고 와야겠다, 그러려면 사료를 더 사야겠다, 그러려면 커피값이라도 아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