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미래, 그리고 방황하고 있는 지금 [초단편 11]
일상의 바늘은 언제나 정직하게 돌아간다. 잠깐이라도 나와 함께 멈춰있어 준다면 좋을 텐데 시간은 냉정히 흐른다.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나는 붙잡을 새가 없었다. 멈칫하는 사이에 놓치기 일쑤라 다급히 달려 따라잡으려 할 때면 자꾸만 넘어지곤 한다. 그렇게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기를 반복하던 나는 넝마가 되어 지쳐버렸다. 뭐라도 해야 할 텐데. 그럴 의욕은 이미 사라졌고 침체된 나의 상태가 다시 회복될 기미는 없어 보인다.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 나는 그렇게 누워만 있었다.
“가시나야. 쉬는 날 방구석에서 쳐 잠만 잘 줄 알제! 남들은 허구한 날 날이 따시다고 좋다고 근사한 남자친구 데꼬서 데이트하러 가는데, 니도 좀 나가 봐라! 네 친구 갸는 자식까지 보고 둘째도 가졌다며! 니는 인즉까지 뭐 하고 있는 기고! 하, 내 팔자야! 다 큰 가시나 저러고 있는 꼴이나 보고 살아야 하나. 아이고~ 마! 속이 뒤집어진다. 일어나서 청소라도 해라!”
제발, 내버려 둬. 나도 힘들어. 엄마의 잔소리가 조용해질 때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더 깊은 굴을 찾아 들어갔다. 그렇게 숨죽이고 있으니 또로 롱, 도어록 소리가 들리며 엄마가 집을 나서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나는 이불을 조금 내려 천장을 바라봤다. 뭐라도 해야 할 텐데. 진짜 청소라도 할까.
한참 누워 있다 일어나 방 청소를 시작해 본다. 먼저 책상 서랍을 열었다. 아, 이게 여기에 있었구나. 빛바래진 과거의 잔상, 한때 나의 반짝임이었던 그것을 찾아냈다. 세월에 바래 예전의 반짝임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없이 케케묵은 종이의 냄새와 질감으로 그것은 나를 반겼다.
- 오랜만이야. 반가워. 잘 지내고 있어?
아니. 잘 못 지낸 거 같아. 응, 맞아. 난 잘 못 지냈네.
- 그래? 넌 왜 잘 못 지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어? 내가 이런 말을 적었었나? 그것은 계속 나에게 말을 붙였다. 혼란스럽다. 이건 내가 쓴 말이 아닌데. 어째서 달라진 거지? 그것은 학창 시절 과거의 내가 미래의 나에게 쓴 편지이자, 꿈꾸던 나의 모습을 그렸던 글이었기에 당찬 포부만이 가득했어야 했다. 잠깐 당황했지만 나는 과거의 내 편지가 물은 것에 답해 보기로 했다.
넌 알고 있잖아. 현재의 난 네가 원했던, 꿈꿨던 모습 근처에도 못 가고 나이만 먹고 있는 걸. 그리고 지금은 아예 포기하고 멈춰있고…
- 그런가? 내가 보기엔 아닌걸? 정말 네가 멈춰있었다면 상황은 더 안 좋았을 거야. 일단 지금은 현상 유지 중이긴 하잖아? 현상을 유지하는데도 에너지는 쓰여. 넌 지금 힘내서 움직이고 있는 거야. 정말 멈췄다면 지금 이렇게 지쳐있지도 않았을 거야. 넌 지금도 흐르는 시간을 따라잡기 위해서 그 지친 몸을 이끌고 잘 걷고 있어. 그리고 이미 늦었다면 꼭 달려야만 하는 걸까?
궤변이다. 이건 나 좋을 대로 생각하게 만들고 있는 게 분명한 환상이다. 달콤한 말로, 그럴싸한 말로 변명할 뿐인 나약한 나 자신이 만든 환상에 불가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나는 더 듣고 싶어졌다.
- 과거를 바라보면 후회만이 남고, 미래를 바라보면 불안만이 남는대. 지금을 마주 봐. 지금 넌 어때?
난 지금 어떻지? 난 지금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 걸까. 나는 지금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이지?
- 그 무엇이 되었던 나는 너를 사랑해, 나는 나를 사랑해. 잊지 마.
아, 생각이 났다. 이건 내가 쓴 글이 맞았다. 가장 꿈 많고, 가장 자신감이 넘쳤을 무렵의 나는 언제나 그 어떤 나를 포용할 만큼 나를 사랑했다. 그런 나는 꿈꿔왔던 내가 되지 않더라도 나를 사랑할 사람이었다. 내가 포기한 것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살아갈 미래가 아니라 '나'를 사랑하기를, 나 '자신'을 포기한 것이었어. 나는 나를 잃었었다. 과거의 나는 미래의 내가 나를 잃지 않기를, 놓지 않기를 무엇보다 가장 바라왔었다.
지금의 나는 혼자가 아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내가 함께 하는 지금 이 순간, 혼자가 아닌 나...
내가 첫 호스트를 맡았을 때 쓴 글이다. 글감 주제는 「노래를 골라 가사, 혹은 느낌에 맞춰 글쓰기」였다. 나는 서영은의 『혼자가 아닌 나』를 선곡했다. 많은 위로가 되는 곡, 그 곡에 맞춰 위로가 되는 글을 써보고 싶었다. 글은 잘 나왔다고 생각했고, 미션은 하나 더 있었다. 무작위로 섞어 '어울리는 글과 노래 찾기'였다. 브런치스토리에 올리는 글은 최종본으로 마지막에 노래 제목이 그대로 붙었지만 모임에서는 지웠었다. 결과는 내 곡을 다른 분께 뺏겨 버리고 말았다는 웃픈 일이 발생했다.(나 또한 그 글에 한 표를 줄 수밖에 없었다.)
잘 쓴 글인데 내 글보다 더 어울리는 글이 나타나다니! 억울했지만 재밌는 경험이었다. 다 함께 글쓰기 모임을 가진다면 랜덤 뽑기로 이러한 방법을 진행해 보아도 즐거운 활동이 될 수 있음을 여러분께 추천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