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태권도 비긴즈
H는 꽃보다 발차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지금, H 인생 최대 위기가 찾아왔다.
비상사태. 늘 정신없이 시끄러운 첨지의 집에 난데없이 긴장감이 감돈다. 바로 H가 태권도 심사를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작년에 요행으로 1급을 따긴 했지만, 올해 심사를 볼 2급이 '찐'이란다. 1급 때는 첨지도, H도 그저 축제 분위기였다. 네가 태권도를 배운다고 뽈뽈거리고 돌아다니더니 무슨 품띠를 딴다고 설치는 게냐! 그게 뭔디! 둘 다 철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완전히 다르다. 1급을 따온 뒤 H의 마음가짐이 180도 바뀐 탓이다. 막상 해보니 이것은 실전이었단다. 심사위원 선생님들이 눈에 불을 켜고 누가 실수를 하는지, 안 하는지 철저히 지켜보신다고 했다. H는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긴장했다. '뒤돌려차기'가 아직 완벽하지 않은데, 이런 모자란 실력을 어떻게 선보여야 할지 고민이 많아 보였다. 집에서도 연습을 이어갔다. 밤 9시가 되어도 뒤돌려 차기를 하려고 했다. 첨지는 말렸다.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연거푸 말렸다. 제발, 과몰입을 멈춰줘. 불안한 마음은 알겠지만 나도 지금 아래층에서 올라올 것만 같아서 불안해.
첨지는 문득 H의 첫 도전을 떠올렸다. 그때는 태권도가 아니었다. 얌전해지길 바라는 염원을 담아 소수 정예 꽃꽂이 수업을 보냈었다. 그리고 장렬히 실패했다. 꽃에 집중해야 하는데, H는 계속 옆자리 친구가 어떻게 만드는지 집중하고, 훈수를 두느라 바빴다. 손도 세 쌍이나 되니 이것저것 만져보느라 수업이 제대로 이어질 수가 없었다. 선생님이 진땀을 빼셨다. 수업 말미에는 늘 이런 코멘트가 있었다. "어머니, 오늘도 H가 재료를 마음껏 사용했네요. 다른 아이들보다 더 많이 챙겨드렸습니다." 최종적으로 동생 J의 한 마디가 첨지의 희망을 끊어놓았다. "엄마, 언니랑 같이 수업 듣는 거 조금 힘들어. 말이 너무 많아."
그때 첨지는 소문을 들었다. 에너지가 넘치는 애들은 태권도에 가야 한다더라.. 그곳에는 이미 벨라키랍토르가 다니고 있다고 했다. 그곳에 가면 케르베로스도 살짝 묻혀갈 수 있지 않을까? 꽃꽂이 수업보다 수강료도 비할 수 없이 저렴했다. 첨지는 떨리는 마음으로 태권도장에 등록했다.
우리 케르베로스는 잘 적응하는 것 같았다. 오늘은 어떤 오빠랑 싸웠네, 오늘은 누가 건방지게 굴었네, 말은 많았지만 뒤에서 캐본 결과 혼자서만 셰도우 복싱을 하는 듯했다. 싸웠다는 오빠는 H가 누구인지도 몰랐다. 웃펐다.
그런데 곧 쎄함을 느꼈다. 1장을 배웠다고 하길래 집에서 해보라고 했더니 기억이 잘 안 난다고 했다. 모양새도 조금 웃겼다. 손끝에 힘이 들어가질 않는지 히리비리한 동작으로 간신히 1장을 해보였다. 태극인이 아니라 마치 새처럼 팔짝거렸다. 이게 맞나..? 운동신경이 전혀 없는 듯했다. 관장님 눈치를 살폈다. 약간 H에게 화가 난 듯 하셨다. 첨지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 태권도도 여기서 끝이구나.’ 그런데 웬걸, 그 상태로 1급을 따버렸다. 첨지는 결론을 내렸다. 돈만 내면 되는 거였구나.
그렇게 흘러간 1년. 정신과에서 메디키넷을 처방받아 먹은 뒤, H에게 많은 변화가 생겼다. 그중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코 태권도 실력이다. 흐물거리던 손끝에 힘이 생기고, 동작에 각이 살았다. 예비 태권도인으로서 마음가짐도 장착했다. 1급 때는 축제에 참석하는 마냥 설렌 어린아이였다면, 2급을 준비하는 지금은 자신이 무엇을 잘하는지, 어떤 부분이 부족한지 제대로 파악하고 연습에 매진한다.
곧 심사가 시작한다. H를 포함한 첨지, L과 J 모두 떨리는 순간이다. ‘제발.. 뒤돌려차기 한 번에 세 개의 머리가 동시에 돌아가지 않기를..’ 첨지는 숨죽여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