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태권도 심사를 대하는 자세
드디어 결전의 날이다. H가 태권도 2품 심사를 보는 날. 오늘을 위해 H는 지난 한 달 동안 매일 태권도를 한 시간씩 연마했다. 주말에는 무려 두 시간이나 갈고 닦았다. 뒤돌려 차기는 특히나 더 신경썼다. 관장님과 H는 긴장의 끈을 늦추길 원치 않았다. 그래서 정신과에서 받아온 알약들을 주말에도 빼놓지 않고 꼬박꼬박 먹었다. 첨지는 궁금한 게 많았으나 H는 단 하나도 알려주지 않았다. 머리가 세 개인 케르베로스는 입도 세 개라 늘 말이 많았는데. 첨지는 기분이 약간 이상했다. 이 감정에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서운함’인 것도 같았다.
관장님의 특명이 내려졌다. ‘심사 당일에는 스포츠 센터가 혼잡할 것으로 예상되니 관람을 원하시는 부모님은 대중교통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오...?! 구경을 가도 되는 거였구나! 첨지는 심장이 뛰었다. 내 작은 케르베로스의 옹골찬 몸짓이 너무 보고 싶었단 말이었다. 태권도학원에서 돌아온 H에게 첨지가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H야! 엄마 그날 가서 봐도 되지?” 첨지가 아는 H라면 거절할 리가 없었다. H는 어린이집 시절부터 주목받는 것을 즐겨왔다. 크고 작은 행사가 있을 때마다 무대로 올라가 사람들의 시선을 즐겼던 몸이다. 보통의 아이들이 몸을 사리거나 수줍어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H는 언제 어디서라도 멍석이 깔린 곳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그래서 첨지는 남편 L. 동생 J도 당연히 데려갈 심산이었다. 가서 H의 주목욕구를 마음껏 충족시켜주려 했다. 할 수만 있다면 시부모님과 친정부모님도 동행하고 싶었다.
그런데 첨지의 말을 들은 H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아니! 아무도 오지 마. 부담스럽단 말이야.” 응? 아무도 오지 말라니, 그게 무슨 뜻이지? 첨지는 순간 잘 못 들은 줄 알았다. 내 딸이라면 거절할 리가 없는데, 첨지는 믿을 수 없어서 재차 물었다. “응? 오지 말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당연히 우리 가족이 꼭 가서 널 응원해줘야지!” 이 말이 끝나자 마자 H의 얼굴이 한층 더 일그러졌다. “아니 엄마, 그렇게 우루루 몰려오면 내가 집중을 할 수가 없잖아. 그리고 혹시나 실수라도 하면 너무 창피할 것 같아. 제발 아무도 오지마.” 첨지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 넌 대체 누구니? 첨지가 알던 H가 아니다. 어떻게 케르베로스가 이렇게 바뀔 수가 있는지. 정신과에서 받아온 작은 알약이 H의 뇌에 뭔가 큰 변화를 준 것임에 틀림없었다.
한편 서운한 것은 첨지뿐만이 아니었다. 남편 L도 청천벽력같은 소식에 침울해진 것은 매한가지였다. L은 H에게 거의 애원하다시피 말했다. “아빠만이라도 데려가 주라.. 심사 마치면 햄버거 사줄게..” H는 한동안 고민하다가 조건을 달았다. “알았어. 대신 나를 발견해도 아는 척 하지 마. 내 집중력만 흐트러지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한테도 피해가 가니까. 알았지? 이건 꼭 지켜야 해.” 엄중하게 약속한 후 L만 간신히 참관의 영광을 얻었다. 첨지는 속된 말로 개부러웠다. 참아야 하는 현실이 야속했다. 주목받는 게 싫어서 아무도 초대하지 않는다니.. H의 인생에 새로운 챕터가 새겨지려나.. 좋게 생각해보려 해도 좋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첨지는 H대신 L를 잡도리했다. [H는 어디에 있어? 사진 찍어서 보내줘.] [지금 심사 시작해? 동영상 잘 찍어서 보내줘.] [더 확대해서 찍어야지!] [앞사람 머리에 가려서 안 보이잖아!] L은 군소리없이 첨지의 지령에 맞춰 사진과 동영상들을 무더기로 전송해줬다. 첨지와 J는 집에서 작은 휴대폰 화면에 집중했다. 줌을 최대치로 당겨 해상도가 다 깨진 사진을 보며 H의 표정이 굳었니, 어쨌니, 발차기를 구령에 맞춰서 했니, 안 했니, 토론을 했지만 H가 빨리 집에 와서 후기를 들려주지 않는 이상 알 수가 없었다. 애가 탔다.
[심사 끝났어. H 잘했고, 햄버거는 집에 가서 먹겠대.] L에게 카톡이 왔다. 첨지는 누군가를 그렇게 오랫동안 기다려 본 적이 없었다. 30분이면 도착할 텐데, 30분이 이렇게 길었던가. J와 함께 유튜브를 보며 정신을 분산시키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H와 L이 도착했다. H의 얼굴은 한결 가벼워 보였다. “오늘 심사 어땠어..?” 최대한 조심스럽게 물었다. “응. 평소대로 했어.” 산뜻한 대답. 첨지의 마음도 가벼워졌다.
그러나저러나 궁금한 게 또 있었다. “햄버거를 왜 굳이 집에서 먹어? 매장에서 먹고 오지?” “아.. 사람 많은 곳 싫어. 정신 없어.” 오.. 관객의 시선을 즐기던 케르베로스가, 이제는 조용히 집중하는 태권도 유단자로 바뀌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