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끼손톱보다 더 작은 알약에 걸린 미래
비 내리는 오후. H와 최첨지는 또 정신과에 갔다. 한 달에 한 번씩 진료를 받고, 약을 타오는 루틴이 일상 속에 잡혔다. 정신과에 가는 날이 되면 H는 아침부터 들떴다. 의사 선생님이 H의 말을 잘 들어주시는 것도 있었지만, 그날은 학원을 모조리 빠져도 괜찮았기 때문이었다. 첨지는 아침마다 H에게 약을 먹이며 어깨에 달린 두 머리를 티셔츠 속으로 집어넣었다. 예전 같았으면 내 머리들한테 손대지 말라며 소리를 질러댔을 H가 약을 먹은 후부터는 달라졌다. 엄마가 그러건 말건 신경도 안 쓰고 룰루랄라 등교하는 H를 보며 첨지는 한 편으로는 기분이 좋았고, 또 한 편으로는 씁쓸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오늘도 H가 먼저 진료실에 들어갔다. 첨지는 대기실에 혼자 앉아 질문할 것들을 속으로 정리했다. 일단 H가 내성적으로 변모한 것이 가장 마음에 걸렸다. 분명 처음에는 기뻤다. 음식을 먹을 때도 정갈하게 먹었고, 특히 문제집을 풀 때 조용히 앉아 골똘히 고민하는 모습이 가장 예뻐 보였다. 이것이 일반적인 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마음가짐인가? 처음으로 찾아온 평화에 잠시 행복하기도 했다. 그러나 태어났을 때부터 머리가 세 개였던 딸에게서, 나머지 머리 두 개가 사라지는 모습을 본다는 것이 영 슬픈 것도 사실이었다. 첨지는 자신의 이런 마음이 대체 뭔지 가늠할 수 없어 혼란스러웠다. 오늘 정신과에 온 참에 자신도 진료를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음, 머리 두 개가 많이 작아졌네요. 스스로 잘 숨기고 다니나 봐요. 당분간 약 용량은 이렇게 가면 되겠어요.” 의사 선생님은 H와 단 20분간 대화를 나눴을 뿐인데 모든 것을 간파하셨다. 역시 자신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는 듯, 확신에 찬 말투였다. 첨지는 살짝 움츠러들었다. 지금 이 말을 해도 될까.. 하지만 오늘이 아니면 또 한 달을 혼자서 고민해야 했기에 용기를 내어 말을 꺼냈다. “저.. 선생님. 그런데 H가 성격이 많이 달라졌어요. 지난 번에는 태권도 심사날에 오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이게 제가 낳고 키운 딸이 맞는지 잘 모르겠어요.”
의사 선생님은 단호하게 한 마디 하셨다. “이게 바로 H입니다. 그전에는 H의 이런 면을 나머지 머리 두 개가 혼란하게 만들었던 거예요.” 첨지는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했다. 이게 H의 진짜 모습이라고..? 그럼 내가 지금까지 부대끼고 살았던 애는 누구였어?
약국에 들러 한 달치 알약을 받아들고, H와 함께 집으로 향했다. H는 내내 신나 보였다, 의사 선생님에게는 자신의 머리가 세 개라는 것을 숨기지 않아도 되어서 좋다고 했다. 이건 비밀인데, 자기처럼 똑똑한 애들만 머리가 더 달려있는 거라고 했다. H는 의사 선생님의 말을 철썩같이 믿었다. 괜히 의사 선생님인 게 아니었다.
첨지도 신나면 좋으련만, 심란한 자신에게 화가 났다. 애가 남들과 다른 게 싫어서 병원까지 데려가 약까지 먹이면서, 이제와 남들과 같아진 게 싫다니. 모순 아닌가. 어쩌자는 건지, 자신에게 화가 났다. 지금부터는 H가 아닌, 첨지 스스로가 첨지가 다스릴 대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