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에는 꼭 일이 터진다

결석하고 싶었던 추석 이야기

by 최첨지

대명절, 추석이다. H에게 추석은 간식 원 없이 먹는 날, 유튜브 하루종일 보는 날, 용돈 받는 날이다. 7살 J에게도 별반 다르지 않다. 남편 L에게는 맛있는 음식을 한가득 만들어 가족과 나누어 먹는 날, 그러나 첨지에게 추석이란 조금 다르다. 긴긴 시간 그저 편안한 집을 떠나는 날이다. 시댁, 친정, 어디에 가도 잠자리가 영 불편하고 소화도 잘 안 되기 때문이다. 변비도 꼭 걸리고 말이다.

‘아, 아무데도 가고 싶지 않다. 그냥 집에 나 혼자 있으면 안 되나?’ 첨지는 살짝 개수작을 부려본다. 여기저기 쑤시고 결리다고 아픈 척도 해보고, 요즘 하는 일이 너무 많다며 바쁜 척도 해본다. 하지만 예리한 L에게 통하지는 않았다. 첨지가 괜히 명절을 싫어하는 건 아니었다. 시집살이? 아니다. 잔소리? 그것도 아니다. 언제, 어디서도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는 게으른 첨지였으나 타당한 이유는 있었다.


추석이 되면 H의 머리 세 개가 더 커지기 때문이다. 목소리도 더 커지고, 행동도 더 거칠어진다. 첨지가 머리들을 집어넣으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더욱 거세게 반응하며 뛰쳐 올랐다. 평소 H의 머리 숨기기에 온 정신을 집중하는 첨지는 양가 할머니 집에서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H를 참아낼 수가 없었다. 어른들의 반응도 걱정됐다. 이런 광경은 처음보실텐데.. 분명 놀라실텐데.. H가 한 살 한 살 먹어갈수록 쉽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기를 쓰고 숨겨야만 했다.

그런데 이번 추석에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H가 스타벅스에서 삼두견의 진면목을 뽐냈기 때문이다. 10살이나 먹은 어린이가 징징 떼를 쓰며 테이블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 자신이 주문한 푸딩이 늦게 나온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영원히 들키고 싶지 않았는데, “얘가 왜 이러니?”라는 부모님의 눈빛에 당황해서 그렇게 되었다. 얼떨결에 H의 조부모님들께 H가 케르베로스라서 약을 먹는다는 사실을 알린 것이다. ‘아, 이젠 돌이킬 수 없구나. 망할.’ 참담한 심정으로 두 분을 바라봤는데, 예상과는 전혀 다른 전개가 펼쳐졌다.

늙은 부모님은 당연히 삼두견이 뭔지 모르실 줄 알았는데 말이다. 반전이 시작됐다. “얘가 날 닮아서 그래. 나는 머리가 다섯 개였어.”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첨지는 잠시 정신이 아득해졌으나 가까스로 정신줄을 붙잡았다. 그 멘트 때문에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행복했다. 사실이든 아니든 첨지와 H를 위한 말씀이었음에 분명했다. 부모님과 삼두견 토크가 가능하다니, 꿈에도 생각 못했던 일이다. 삼두견 토크는 한참을 더 이어졌다. 거기서 더 나아가 “대안학교에 보내는 건 어떠니?”라고 조언도 해주셨다. 남편 L에게서도 받지 못했던 격려와 응원이었다. 첨지는 충만한 이해로 둘러싸인 기분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와 첨지는 이번 명절에서 있었던 일을 가만히 복기해보았다. 어디에 자랑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막상 커밍아웃하고 보니 놀랍게도 첨지의 마음이 편해졌다. 그토록 불편하게 느껴졌던 잠자리도 갑자기 편안하게 느껴지고, 입맛에 안 맞았던 밥도 두 세그릇씩 막 들어간다. “다음 번에는 조금 더 오래 있다가 갈까?” L에게 먼저 이런 말도 능청스럽게 한다. 그리고는 난데없이 ‘나는 좀 복이 많은 첨지인가?’하는 생각도 막 든다. 물론 그 옆에서는 7살 L과 삼두견 H가 베게 싸움을 하고 있고, 베게는 터지기 일보 직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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