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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담 Aug 23. 2024

1등 아닌 1번

모든 1번 들에게 박수를

부재중 전화가 떴다. 확인하고 전화를 드렸다. 잘못 눌렀다고 하신다. 오늘 버튼을 잘못 누르신 분은 어머니다. 어떤 날은 아버지로부터 잘못 걸려온 전화가 몇 통 된다. 단축번호를 빨리 누르지 못한 탓이다. 시간이 갈수록 더 자주 일어난다. 두 분의 핸드폰 단축번호 1번은 장남인 나다.

11번부터 19번까지의 단축 번호를 누르시다 미쳐 뒷번호를 누를 사이도 없이 1번으로 연결돼 황급히 종료하지만 내겐 부재중으로 남는다. 속도의 매정함을 탓할 순 없다. 연세가 많아지시면서 문명의 이기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신세를 한탄하신다. 안타깝다. 잘못이 아닌 세월 탓이다. 부재중 전화로 알게 된 1번의 존재, 두 분께 1번인 나는 어떤 의미인가? 문득 1번을 생각해 본다. 1번이어서 마음이 아리다.

궁금하다. 당신에게 1번은 누구 인가?


축구에서 가장 잔인한 순간이 승부차기다. 승부차기는 승패를 기록하지 않는다. 단지 진출과 탈락을 결정할 뿐이다. 승패 없는 극도의 승부를 위해 다섯 명씩 순서를 정해 찬다. 승부차기는 기선제압이 가장 중요하다. 가장 중요한 선수가 1번 키커다. 중압감이 가장 크다. 정확하고 담대하며 믿음직한 선수가 1번으로 나선다. 그는 1번의 무게를 견뎌내야 한다.


야구에서는 가장 정교하고 빠른 선수가 1번 타자다. 물꼬를 트고 나가서 상대편을 흔들어 놓는 역할을 맡는다. 타율도 중요하지만 1번 타자에게 가장 요구되는 기록은 출루율이다. 1번 타자는 무조건 많이 나가야 한다. 나가서 상대방 수비를 휘젓고 교란시켜야 한다. 투수의 신경을 거슬려 실투를 유발해야 한다. 1번 타자는 꽤는 여우 같고 빠르기는 치타 같아야 한다. 1번 타자는 어떤 방식으로든 살아 나가야 하는 자신의 의무를 다 할 때 각광받는다. 1번은 물꼬를 트는 첨병이다.


400m 계주에서 승부를 가르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주자의 순서다. 4명의 주자들은 각자 자신이 가진 장점에 따라 4개 구간 중 가장 역할을 잘 해낼 수 있는 구간을 담당한다. 1번 주자는 가장 빠르지는 않지만 스타트 능력이 뛰어나고 곡선주로에 강해야 한다. 찰나의 순간 승부가 갈리는 경기에서 1번 주자의 역할은 막중하다.


중학교 때 늘 1번이었던 친구가 있었다. 항상 웃고 다니며 긍정적이었다. 키만 작았지 옹골차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지닌 그 친구의 이름은 졸업식 때 가장 빛났다. "ㅇㅇㅇ외 396명의 졸업장을 수여합니다." 

몇 년 전 추석 때 만난 그 친구의 키와 목소리와 웃음은 그대로였다. 변함없는 1번 친구가 참 좋다.


학창 시절, 시내를 오갈 때 타고 다니던 버스도 1번이었다. 수많은 노선 번호 중에 1번 버스는 늘 마을 앞을 지나다녔다. 시내를 출발해 마을을 지나 1시간여를 더 달린 버스는 종점인 천년고찰 선암사에서 멈췄다. 20대의 한 지점, 그 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내려 선암사 왼쪽 조그만 암자에 들어갔다. 유난히 가물고 더웠던 여름을 그곳에서 보냈다. 1번 버스는 사람만 싣고 다닌 게 아니었다. 사랑도 우정도 치열한 경쟁의 시간도 함께 싣고 달렸다. 1번 버스에서 우연히 만난 여고생을 짝사랑했다. 그때부터 1번 버스는 놓치면 안 되는 약속이었다. 1번 버스를 탈 때마다 혹시나 그녀가 타고 있지 않을까 늘 설레는 마음으로 버스 안을 둘러보았다. 마을 앞을 지나는 버스는 1번과 2번이었는데 안타깝게도 노선이 짧은 2번 버스가 더 자주 다녔다. 짝사랑 그녀가 사는 곳엔 1번 버스만 다녔다. 오갈 때마다 2번보다는 1번 버스를 기다렸다.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1번 버스는 여전히 그대로의 노선을 달리고 있다. 짝사랑과 시끌벅적 친구들의 요란함은 어딘가로 사라졌다. 만원 버스의 북적거림도 먼 옛날이야기가 되었다. 오늘도 묵묵히 제 갈 길을 달리고 있는 1번 버스를 생각하니 마음 한구석이 먹먹하다.


1등이 아닌 1번의 가치와 의미를 새겨본다. 먼저 가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은 1등이지만 함께 가기 위해 짐을 지는 존재는 1번이다. 1등은 쟁취하는 것이라면 1번은 주어지는 것이다. 1등은 남을 이겨야만 얻을 수 있는 자리지만 1번은 나를 극복하고 남을 끌어 주는 자리다. 1번은 남겨진 번호다. 1번의 자리는 운명이다. 극복해야 한다. 1등이 아닌 모든 1번에게 힘찬 박수를 보내며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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