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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담 May 29. 2024

느리면 보이는 것들

200m 가는 데 30분이 걸렸다

농장으로 가기 위해 현관문을 나선다.

마당에 잔디와 풀이 많이 자랐다. 눈에 보이는 대로 풀을 몇 개 뽑는다. 잔디는 동력예초기로 깎아야 한다. 마당 한편, 삽살개 산이가 살았던 자리에 시선이 머문다. 아직도 빈자리가 크다. 그 자리에 밭을 만들어 토종 호박, 오이, 참외, 토마토를 심었다. 먹거리를 통해 생명과 자연을 살리는 일에 헌신하고 계신 분이 직접 키운 모종을 주셨다. 토종이 떠난 자리에 토종이 자리했다. 지난밤에 세차게 내린 비로 두둑이 허물어져 다시 흙을 채우고 다져준다. 주인의 게으름과 자연의 심술을 잘 견뎌 내주길 부탁한다. 토종이라 더 듬직하다.


마당 입구에 놓인 노란 우체통이 눈에 띈다. 몇 년 전에 딸이 직접 만든 우체통이다. 공부를 위해 서울로 간 딸의 소식은 우체통으로 전달되지 않지만 놓여 있는 모습만 봐도 그리움이 스며든다. 어제 배달된 신문이 그대로 담겨 있어 꺼내 놓는다. 한 통의 우편물이라도 배달하기 위해 애쓰시는 집배원분들의 마음을 생각하면 우체통은 늘 비어 있어야 한다.


집 뒤에는 겨우내 화목보일러에서 꺼내 놓은 재를 쌓아 둔 곳이 있다. 음식물 찌꺼기와 풀, 낙엽 등의 부산물을 섞어 거름을 만들고 있다. 버려진 음식물 탓인지 어지럽게 파헤쳐 져 있다. 먹이를 찾아 떠도는 길냥이와 새들의 소행이다. 삽으로 다시 다져 놓고 길을 간다.


농장으로 향하는 길가에 발걸음을 오래 멈추게 하는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검붉은 색의 달콤한 오디다. 띄엄띄엄 다양한 크기로 자라고 있는 뽕나무마다 오디가 가득하다. 한 그루에서 한 움큼 먹고 다시 몇 걸음 옮겨 한 움큼, 벌써 손가락과 입 주위는 진한 보라색으로 물들었다. 먹고 나서 안 먹었다 숨길 수 없는 게 오디다. 이빨까지 보라색으로 물들었다. 새들도 가지에 앉아 오디를 따 먹는다. 그들에게도 푸짐한 성찬이다. 길바닥에는 오디 색깔을 띤 새들의 배설물이 널려 있다. 오디 먹은 것을 드러내는 모양새는 새와 사람이 다르지 않다.


몇 해전 오디나무를 많이 심었다. 나름 새로운 농사에 도전한다고 야심 차게 시작했는데 생각할수록 어설펐다. 싹이 나오자 고라니가 보란 듯이 다 먹어 치웠다. 오디나무는 그 해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모두 말라죽었다. 그 밭에 다시 새로운 희망의 싹을 틔우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좋아하는 오디는 이렇게 오가는 길에 실컷 따서 먹는 걸로 대 만족이다. 내일 아침에는 바구니에 한가득 오디를 따서 아내와 아들에게 맛 보여야겠다.


농장 입구로 들어서니 세찬 비바람에 부러진 참나무와 감나무 가지가 어지럽게 뒹굴고 있다. 손으로 주워 치우고 있는데 애완묘 가을이가 야옹하며 마중 나온다. 꼬리를 바짝 세우고 다가오다 바로 뒹군다. 쓰다듬으며 간밤의 안부를 전한다. 벌떡 일어나 앞장서 걷는다. 오늘따라 농장 앞을 흐르는 조그만 개울가 물소리가 크게 들린다. 수로 밑으로 떨어지는 맑은 물이 청량감을 더한다. 물소리를 들으며 흐르는 물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느리게 가는 발걸음 따라 마음속 고요와 충만이 가득 밀려온다. 울창한 나무 사이를 걸림 없이 나는 새들의 경쾌함도 새롭다.


경사진 길을 오르며 양옆으로 번갈아 눈길을 준다. 시간의 도움으로 훌쩍 자란 나무들이 기특하다. 남도에서 가져온 주목 여섯 그루도 튼실하게 뿌리내려 제법 폼을 낸다. 애정 하는 나무 중 하나인 남천의 다양한 빛깔은 볼 때마다 경이롭다. 어지러이 웃자란 풀과 잡초를 몇 가닥 뽑는다. 올해도 대나무는 위세를 떨쳐 죽순을 엄청나게 돋아냈다. 점점 멀리 넓게 뻗어가는 대나무를 바라본다. 어디서 세력 확장을 멈출까? 인력으로는 막을 수 없는 그 완강한 어둠 속 마디마디의 힘을 아직은 지켜만 보고 있다.


주인의 발자국 소리를 들었는지 꼬꼬들의 밥 달라는 목소리가 맹렬하다. 평소보다 조금 늦은 것을  꼬꼬들은 금방 알아차린다. 조금 서둘러야겠다.

종일 클래식이 나오는 라디오를 켜고 정성껏 만들어 놓은 모이를 담는다. 수레에 가득 싣고 힘껏 밀고 나간다.


집에서 농장까지의 거리는 200m, 오늘은 그 거리를 가는 데 30분이 걸렸다. 느리게 가며 더 많이 보고 듣고 채웠다. 맑고 향기로운 순간들이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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