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모님, 우리 곁에 오래오래 함께 하시길~
가볍고 설레는 출발이다. 서둘러 농장 일을 마무리한다. 남은 일들과 마무리는 아들 몫이다. 아들의 일 처리는 딱 부러진다. 믿고 맡길 수 있어 든든하다. 차에 올라 시동을 거는 아내의 얼굴도 환하다. 졸음운전에 일가견이 있는 남편 때문에 고생이 많다. 출발부터 30분까지가 졸음의 최대 고비다. 아내의 배려로 나는 조수석에서 잠시 눈을 붙인다. 길은 막힘이 없다. 달리다 보니 아내가 한 시간 넘게 운전을 했다. 졸음쉼터에서 교대했다. 다시 힘차게 출발!
오늘은 아흔을 가볍게 넘기신 장모님 생신이다. 우애 좋고 유순하며 성실한 7남매를 거의 혼자 힘으로 키우셨다. 장인어른은 2년 전 한 세기를 5년 남겨 두고 먼 길을 떠나셨다. 일제 강점기 한복판에 태어나, 청년이 되어 광복을 맞이했다. 빼앗긴 강토를 되찾은 감격도 잠시, 나라는 극렬한 이념과 정쟁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군 입대 후 전역을 했으나 동족상잔의 비극 속에 다시 하사관으로 징집되었다. 결혼하고 1년도 안되어 일어난 일이다. 장모님은 신랑 없는 시댁에서 새색시로 눈물겨운 시절을 보냈다. 그 시대 어른들의 서사는 감히 범접할 수 없다. 전쟁을 겪어낸 경험은 건강한 정신과 신체를 용납하지 않았다. 장인어른은 힘겨워하셨다. 7남매를 위한 가장의 본분은 버거웠다. 나름 열심히 살아 내셨지만 모두가 먹고살기 힘든 시절,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다.
7남매와 집안을 이끌어 가는 일은 온전히 장모님 몫이었다. 시집오기 전 번듯한 집안의 맏딸로 귀하게 자라셨다. 아래로 네 명의 남동생과 우애도 깊었다. 남동생들의 누님에 대한 마음은 애틋했다. 한 씨 집안의 맏며느리로 시집와 갖은 고생과 아픔을 견뎌 내신 힘도 어릴 적 친정에서 받았던 사랑과 환경 때문이었다. 아내와 결혼 후 처가를 가면 장모님은 아침상을 차려 놓고 새벽 일찍 일을 나가셨다. 딸과 사위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야 오죽하셨을까. 일터에서는 손끝 야무지고 깔끔한 장모님을 고급인력으로 계속 찾았다. 생각해 보면 적지 않은 연세에 대단한 능력과 경력이시다.
1932년 생, 아흔세 살이신 장모님은 여전히 청춘이다. 마음은 소녀 같고 걸음걸이도 씩씩하다. 등과 허리는 아내보다 더 꼿꼿하다. 옷차림은 화려하고 밝은색을 좋아하신다. 처가를 방문해 문을 열고 들어가면 장모님은 우리들 옷차림부터 검열하신다. 사람은 옷차림에서 많은 것을 드러낸다는 게 장모님의 지론이다. 비싸고 좋은 옷이 아닌 밝고 깔끔하며 세련된 옷을 입어야 한다. 청춘의 한 시절, 7남매를 키워내고 집안을 건사하기 위해 안 해본 일 없이 갖은 고생을 다하셨지만 허리 굽어지는 꼴은 보이기 싫다며 늘 자세를 바로 하셨다. 얼마 전 처가에서 장모님과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데 밖에서"언니"하며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나가보니 88세 할머니가 경로당에서 함께 놀자며 장모님을 모시러 온 거였다. 외모는 장모님이 훨씬 젊어 보였다. 경로당에서 고스톱을 쳐도 계산은 장모님이 가장 빠르다. 명절이나 행사 때 모여 고스톱을 칠 때도 새벽까지 버티신 분은 장모님이다. 나는 무거운 눈꺼풀을 견뎌내지 못하고 날이 바뀌기 전에 아내와 교대한다. 고스톱을 치는 동안에도 속도가 느리다고 장모님께 핀잔을 듣는다.
장모님의 기억력은 비상하다. 창가와 불경을 지금도 줄줄이 외우고 계신다. 놀랍다. 전화를 통해 전해지는 목소리는 밝고 활기차다. 늘 자식 건강과 행복부터 챙기신다. 한결같으시다.
처가를 가면 장모님과 외식을 하고 카페를 다닌다. 거의 모든 음식을 맛있게 잘 드신다. 카페에서도 사람 구경과 인테리어 구경, 독특한 빵과 음료를 즐기는 낭만을 누리신다. 연세가 드셔도 젊은 감성은 그대로. 집으로 돌아올 땐 늘 기름값을 챙겨주신다.
이번 생신에도 맛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어디든 마다하지 않고 자식들 뜻에 맞춰주신다. 전망 좋고 인테리어가 일품인 카페도 갔다. 건강을 유지하시며 젊은 생각을 갖고 계신 장모님을 존경한다. 진짜 어른이요, 현명한 어머니 시다. 지금처럼 오래오래 함께 하시기만을 바랄 뿐이다.
돌아오는 길, 이번에 다녀갔으니 추석 때는 오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신다. 연휴가 길지만 앞에 휴일이 많은 이번 추석엔 먼저 처가를 다녀올 예정이다. 장모님과 함께 새로운 맛집과 독특한 카페를 가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