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맛에 예민하다. 맛이 없으면 마시지 않는다. 무색무취의 물도 자세히 보면 색깔이 있고 냄새가 있다. 맛과 영양도 제 각각이다. 생수의 종류는 많지만 한 가지 물만 찾아 마신다. 맛도 좋고 깔끔하기 때문이다. 가격은 조금 비싸지만 물을 보약으로 생각하고 마시기에 부담이 되지 않는다. 술도 안 마시고 담배도 안 피우니 기회비용 측면에서도 비교가 안된다.
물은 모든 음식의 기본 재료이지만 그 중요성을 별로 인식하지 못한다. 밥맛을 좌우하는 것도 물이요, 국을 끓이는 데도 물은 전부다. 물맛이 좋아야 술맛도 좋다. 보약도 물이 기본이다.
물을 넣고 빼는 것을 제대로 못하면 그 어떤 것도 그 이상의 효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적정한 양의 물 맞추기가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리고 영양을 배가 시킨다. 물기 없이 바짝 마른 건조물도 물이 잘 빠져야 제 몫을 한다.
꼬꼬들은 사람들 보다 물을 더 많이 마신다. 꼬꼬들이 건강을 유지하고 좋은 달걀을 낳기 위해서는 물이 가장 중요하다. 농장의 꼬꼬들이 먹는 물은 지하 암반수다. 조금씩 흘러나오는 미지근한 물을 언제든 마실 수 있다. 꼬꼬들의 복지를 위한 첫걸음은 깨끗하고 풍족한 물로부터 시작된다.
어릴 적, 마을 앞에는 꽤 넓은 개천이 있었다. 학교를 가려면 산모퉁이를 돌아 좁아진 냇가의 징검다리를 건너야 했다. 건너가고 건너오는 동안 물은 멈춤 없이 남쪽 바다를 향해 흐른다. 그 시원이 어디인지 모르지만 돌 틈 사이를 흐르는 물은 그지없이 맑고 깨끗했다. 돌에 부딪쳐 튀어 오르는 하얀 포말은 그 자체로 청량했다. 학교를 오갈 때마다 하얗게 부서지는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그 시원하고 상큼한 맛은 저절로 웃음이 나오게 하는 마력을 지녔다. 함께 물을 마신 친구들은 서로를 보며 호탕한 웃음을 허공에 날려 보냈다. 물은 돌 틈 사이를 지나고 자갈과 모래 위를 투명하게 스치며 흘러갔다. 물맛에 까다로운 이유는 어릴 적 맛봤던 냇가의 물 때문인 듯하다.
고향 집 마당에는 우물이 있었다. 처음에는 도르래를 이용해 바가지로 물을 퍼 올렸지만 어느 순간 손잡이를 움직여 뽑아 올리는 작두 펌프로 바뀌었다. 퍼 올린 그 물로 밥을 하고 등목을 했다. 콸콸 쏟아지는 펌프의 주둥이에 입을 대고 흠뻑 젖어가며 물을 마셨다. 할머니는 우물에서 물을 길어 매일 아침 정화수를 올리셨다. 하얀 모시적삼을 입으신 할머니와 놋그릇에 담긴 물의 맑은 기운이 지금도 그림처럼 펼쳐진다. 할머니에게 물은 간절하고 고결한 기도와 믿음의 원천이었다.
가까운 곳에 속리산이 있다. 속리산의 작은 물방울들은 모이고 모여 계곡을 타고 흘러내린다. 어느 쪽 능선을 타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색깔과 운명의 강물이 된다. 세 갈래로 나뉜 물은 한강, 금강, 낙동강에 합류한다. 마을 앞의 물은 읍내를 지나 옥천군 청산면을 거쳐 금강으로 흘러든다. 백제의 물이었다. 조금 위쪽에 있는 마을의 물은 반대로 흐른다. 그 물은 괴산을 지나 충주에서 남한강으로 스며든다. 고구려의 물이었다. 산을 휘돌아 가면 경북 상주다. 그곳의 물은 문경과 상주의 경계를 지나 낙동강으로 가파르게 흘러간다. 신라의 물이었다. 때때로 각자의 지형에서 방향을 따라 흐르는 물을 만나면 물의 시작과 끝을 생각한다. 물가에 깃든 땅과 마을과 사람과 사연들을 떠올린다. 물의 경계에는 갈등이 없다. 그리움과 인정은 물을 경계로 더 깊어지고 넓어진다.
흔하디흔한 물은 모든 존재의 시작과 끝이다. 생명을 살리는 가장 원초적인 힘이다. 존재하는 미물과 생물들에게 물은 전부다. 우리 몸으로 어떤 물이 흘러 들어오는가에 따라 삶이 달라진다.
요즘은 강이나 바다보다는 돌 틈 사이를 흐르는 물의 소리와 풍경이 좋다. 철모르고 순수한 어린아이 같은 물이다. 어디로 가는지 모른 채 운명처럼 스며들고 흘러내려 아래로 아래로 간다. 그 처음을 보는 마음이 묘하다.
물을 마시며 생각한다. 사는 게 별 건가. 목마른 누군가에게 물 한잔 건네줄 마음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