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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노래

by 최담

낙엽이 움직이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사르륵사르륵 스르르르.

꽃잎처럼 흩날리던 낙엽이 주저 없이 내려앉는다. 쉽게 자리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나뒹군다. 낙엽을 움직이는 동력은 바람이다. 아이들 체험 수업을 위한 준비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공방으로 낙엽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바람은 낙엽을 보내 바쁜 일손을 내려놓게 한다. 밖으로 나와보라며 채근하듯 보챈다. 때마침 대나무 숲 사이를 지나가는 바람 소리도 요란하다. 놀란 새들이 혼비백산하며 날아오른다. 바람은 대상에 따라 각각의 소리를 내며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바람이 나를 불러낸다.


바람은 자유다. 바람은 걸림이 없다. 어느 결에 다가와 나를 스치고 지나간다. 바람을 놓치고 싶지 않아 서둘러 나가 마주한다.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지만 그저 고마울 뿐이다. 언제 오는 지도 모르게 다가와 있는 바람이라 좋다. 어떤 모습으로 와도 편견과 조건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 바람은 말 없는 말로 다가와 친구가 되어 준다. 바람은 걸림이 없어 너그럽고 부드럽다. 그런 바람이 마냥 좋다.


불어오는 대로 마주하는 바람은 때마다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답답하고 막막한 시간이 찾아들 때면 높은 곳에 올라 바람과 마주하는 상상을 한다. 바람은 스쳐 가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다. 바람을 마주하면 잡념이 사라지고 힘이 솟아났다. 그런 바람을 마음속에 담아두고 때때로 끄집어낸다. 바람은 버려야 할 것들과 지워야 할 것들을 말끔히 훑고 지나갔다. 바람이 지나간 자리엔 또 다른 자아의 새로운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농장으로 들어선 입구에 수북이 쌓인 감나무 잎들이 바람에 뒤척인다. 한 생명을 살려내고 열매를 맺게 했던 푸르른 날의 기억을 말끔히 지워 버리려는 듯 미련 없이 떨어졌다. 이젠 가녀린 바람 한 점에도 가뭇없이 흔들리며 떠다닌다. 바람은 감나무 잎들을 어딘가로 데려가려는 듯 살살 달래며 부추긴다. 지금은 낙엽과 바람의 시간이다. 사각거림과 가벼운 움직임은 둘만의 교감으로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자연스레 발걸음이 조심스러워진다.


바람은 평등하다. 대상이 무엇이든 가리지 않는 바람이라 고맙다. 바람은 어루만지고 쓰다듬으며 말을 건넨다. 차별하지 않는 바람의 언어는 모두에게 위로가 되고 휴식이 된다. 어느 바람 부는 곳에는 바람이 전하는 말과 의미가 남겨진다. 그곳을 찾아 다시 바람과 마주하면 들리지 않던 소리와 보이지 않던 풍경이 되살아 난다.

바람은 지나가지 않고 다시 돌아와 스쳐가는 인연마저 붙들어 놓는다. 아무 조건 없이 베풀어 주는 바람이라 두 팔 벌려 온몸으로 마주한다. 바람은 지나치지 않고 그냥 스며든다. 한참을 머물기도 하고 순간으로 지나가기도 한다. 온전히 바람을 누리는 건 각자의 몫이고 각각의 영역이다.


바람은 위로다. 들판에 부는 바람은 작물을 이롭게 하여 농부를 기운 나게 한다. 흐르는 땀을 닦아주는 고마운 손길이다. 누군가의 아픔을 드러내지 않고 어루만져 준다. 아무도 몰라주는 속울음에 바람은 스며들어 고개를 들게 한다. 스스로에게 다시 일어설 다짐을 받게 한다. 갈댓잎을 훑고 지나가는 바람은 갈대의 존재를 빛나게 한다. 바람은 갈대와 함께 춤을 추며 사람들의 발길을 사로잡는다. 사람들은 그 조화에 마음을 빼앗기고 즐거워한다.


바람은 구름에 무늬를 만든다. 바람은 구름을 실어 나른다. 밤하늘에 둥근달이 빠르게 움직이는 건 온전히 바람 때문이다. 어느 결에 바람은 곁에 다가와 옷깃을 여미게 한다. 찬바람이다. 그리움이 짙어지고 다정함이 깊어진다. 안으로 침잠하는 깊은 내면의 시간 속으로 바람이 흠뻑 들어왔다. 바람은 마음속에도 물결을 만들고 무늬를 그려 놓았다. 바람 따라 흐르는 날들이 빨리 오기를 기다리며 오늘을 살아낸다.


바람은 멈추지 않는다. 멈추지 않는 바람에 의지하는 날들도 점점 더 늘어난다. 오늘도 서둘러 바람 부는 곳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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