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한한 존재의 자각

by 최담

매일 쓰던 전자레인지가 드디어(?) 고장 났다. 27년을 함께 했다. 그 긴 시간을 한 번의 고장도 없이 제 역할을 다해 왔다. 습관처럼 음식을 집어넣고 기계적으로 버튼을 눌렀다. 오랜 시간을 붙박이처럼 자리하고 앉아 묵묵히 소임을 다했다. 결국 한계에 다다라 스스로 멈췄다. 아쉽지만 미련 없이 보낸다.


애써 수명을 연장해 오다 멈춰버린 전자레인지를 보며 존재의 유한함에 대해 생각해 본다. 주변에 있는 모든 사물과 인연과 생명들이 나름의 유한한 시간 속에 갇혀있다. 살아가는 동안 함께 하는 많은 것들의 한계 앞에 잠시 멈춰 선다.


시간이 유한하다. 기계적인 시간만 영원처럼 무의식으로 흐를 뿐이다. 내게 주어진 시간의 유한함을 인정할 때 난 새로운 삶의 기준과 철학과 사명을 새긴다. 잊고 흘러가는 시간과 인식하며 함께 하는 시간은 가치와 실존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여준다. 늘 마음에 내 삶의 유한함을 인정하려 노력한다. 도무지 알 수 없는 그 막막한 유한성에 많은 감정이 이입되기도 하지만 가장 큰 소득은 지금 이 순간의 존재 의미와 마주한 것들에 대한 최선의 자세다. 무한한 시간 속에서 유한한 나의 시간은 점점 줄어든다. 유한함을 알기에 주어지고 펼쳐진 순간들이 소중하고 감사하다.


사랑도 유한하다. 무한한 사랑은 없다. 내가 줄 수 있는 사랑의 시간도 유한하고 받을 수 있는 사랑의 시간도 유한하다. 지금 마음껏 사랑하고 표현해야 한다. 사랑한다 주저 없이 말하고 보여 줘야 한다. 사랑은 유한해서 더 아프고 슬프다. 후회 없는 사랑은 지금이 아니면 줄 수도 받을 수도 없다. 유한한 사랑의 야속함에 냉정해져야 한다. 그 냉정함으로 지금 사랑하자.


만남과 인연도 유한의 경계에 서 있다. 언제까지나 함께 할 수 없는 관계의 마디, 그 마디 또한 무수히 많은 변수들로 그어지고 단절되고 끝난다. 만남과 인연에 매달리거나 연연해하지 않음은 그 유한함을 인정하고 단순해지기 위함이다. 담백한 관계의 시간이 필요하다. 서로의 유한함은 자의든 타의든 예고 없이 다가온다. 만남과 인연의 시작과 끝은 늘 현재다.


공간도 유한하다. 적어도 살아 움직이는 시간만큼은 늘 공간의 유한함을 인식하며 그 안에 머무른다. 머무르는 곳에서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끼며 담으려 한다. 공간의 유한함은 꿈과 상상의 무한함으로 마음껏 넓혀 나가면 된다. 아직 그 정도의 열정과 용기는 가지고 있다.


떠나버린 많은 존재들 앞에 다시 서 본다. 간절히 원해 함께 했지만 이젠 추억 속에만 자리한다. 사라져 아득해도 어느 깊은 곳에 남아 내면의 살을 찌우고 오늘을 살아갈 힘을 준다.

모든 존재의 유한함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려 애씀은 스스로를 다독이며 위로하려는 자기 체면이다.

그래야 남은 날들이 덜 괴롭고 조금 힘들고 많이 가벼워 지리라는 믿음 때문이다.


몸의 한계를 거침없이 느끼는 날들이다. 그 한계를 인정하지 않으려 할 때 몸의 파괴는 가속화된다. 현명하게 멈추고 쉬어야 한다. 적당하게 힘쓰고 내려놓아야 한다. 유한한 몸속 에너지의 총량과 생명을 지탱하는 기관들, 근육과 뼈의 질량이 마음을 따르지 말고 몸에 겸손하며 머리로 제어하라고 재촉한다.


유한한 모든 존재는 내게 겸손하고 지혜롭게 살라 말한다. 감사하고 사랑하라 일러준다.

나의 유한한 시간은 지금, 지금이다.


p.s

권력도 유한하다. 감당 못할 권한을 향유하며 누리다 보면 유한한 권력을 무력하게 만들어 무한의 절대적 지위를 얻고자 하는 유혹에 빠진다. 무지몽매한 자들의 일장춘몽이 가엾다. 그들의 유한한 시간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 이 겨울이 가기 전 평온한 일상의 출발에 반드시 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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