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치, 몸치, 박치의 설움을 딛고~
가기 싫었다. 먼저 가자고 하는 사람도 미웠다. 그런데 안 갈 수 없었다. 그토록 가기 싫은 그곳은 거리마다 넘쳐났다. 만나면 자연스레 향하는 장소지만 가고 싶지 않은 마음을 헤아려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후죽순 생겨난 노래방은 한 순간도 반갑거나 즐겁지 않았다. 거기에서 뭔가를 보여주면 처음부터 웃음거리로 전락하는 수모를 속 좁은 나는 견디기 힘들었다.
나는 노래를 못한다. 생각해 보면 노래를 잘할 수 있었는데 너무 일찍 노래 못한다는 낙인이 짙게 찍혀 버린 탓일 수도 있다. 초등학교 5학년, 봄 소풍 때였다. 전교생이 한 곳으로 소풍을 갔다. 그 시절엔 엄마들도 자녀들의 소풍에 따라다녔다. 모두가 함께하는 즐거운 오락시간이 시작되었다. 담임선생님께서 갑자기 나를 호명하면서 앞에 나와 노래를 부르라고 했다. 순간 당황한 나는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전교생 앞에 섰다. 약간 솟아오른 언덕이 그렇게 높아 보이긴 처음이었다. 어떤 노래를 할까 잠깐 고민하다 매일 아침마다 마을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지던 노래가 생각났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로 시작하는 '새마을 노래'를 힘차게 불렀다. 순간 모두의 "와하하~"하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더 이상 노래를 부를 수 없었다. 나는 노래를 부르는 게 아니라 책을 읽고 있었다. 그때부터였다. 사람이 모인 곳에서 노래를 하면 심장이 두근거리고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 치명적 질병을 앓게 되었다. 중학교 때는 모든 과목 중 음악은 거의 '미'를 받았다. 실기는 '가'요, 이론은 '수'! 평균으로 해서 '미'를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가끔 잘 봐주시는 선생님 덕에 '우'를 받을 때도 있었지만.
고등학교 때 음악 실기 시험 시간도 한 소절을 넘기지 못했다. 시작하자마자 바로 선생님의 "그만, 들어가"소리가 들렸다. 노래 못하는 자격지심의 증상은 시간이 흐르면서 악화되었다.
노래를 못하는 것에 대한 트라우마는 집에서도 더해졌다. 아버지는 노래를 잘하신다. 동네는 물론 사방팔방 모두가 인정한 가수다. 결혼을 위해 처가를 처음 방문했을 때 짓궂은 마을 청년들이 동네에서 노래를 제일 잘한 사람과 대결하여 이기면 어머니를 데려가도 좋다는 내기를 걸었다고 한다. 한 곡씩 불러 레퍼토리가 바닥나면 지는 경기였다. 두세 시간 넘게 이어진 경연에서 승자는 아버지셨다. 몇 곡을 불렀는지 헤아릴 수 없이 계속된 대결에서 상대가 먼저 두 손을 들었다고 한다. 어릴 때 외가에 가면 마을 분들이 아버지의 전설적인 노래 대결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그런 아버지는 노래 못하는 아들을 이해하지 못하셨다. 엄청 핀잔을 주셨다. 나의 노래는 집에서도 제대로 나오지 못했다.
노래를 못하는 대신 듣는 데는 도통했다. 지금도 모든 장르의 음악을 가리지 않고 즐겨 듣는다. 클래식, 민요, 국악가요, 락, 트로트, 발라드, 팝송, 힙합, 랩, 재즈에 동요까지. 혼자 공연도 보러 다녔다. 생활 속에는 늘 음악이 함께 했다. 학창 시절 자취하면서 가장 갖고 싶은 게 오디오였다. 마침 인켈에서 고가의 컴포넌트 오디오 시스템이 출시되었다. 학생 신분에 구입할 수 있는 가격이 아니었다. 갖고 싶은 마음을 달래고자 광고지의 사진을 오려서 지니고 다녔다. 어느 날, 그 간절한 마음을 알았던 선배 형이 선뜻 제안을 했다. 할부로 사줄 테니 매월 조금씩 갚을 수 있겠냐고. 나는 자신 있게 약속을 했다. 바로 다음날 나의 조그만 자취방에는 꿈에 그리던 오디오 한 대가 멋지게 자리 잡았다. 불을 끄고 음악을 들으면 이퀄라이저의 춤추는 그래픽마저 신비로웠다. 듣고 싶은 가수의 노래와 음악 CD를 사모은 재미는 덤이었다. 혹시 누가 선물을 한다고 하면 무조건 CD를 사달라고 했다. 그 오디오는 여러 번의 이사를 함께 다녔고 결혼 후 신혼집에서도 가운데 자리를 차지했다.
노래 못하는 설움과 울분을 듣고 감상하는 것으로 토해내고 해소했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렇게 귀명창이 되었다.
다시 생각해 보면 선천적 음치는 아닌 듯하다. 가끔 목소리를 가다듬고 편안하게 부르면 노래가 자연스럽게 나온다. 이젠 애창곡도 있다. 나름 제대로 부를 수 있는 노래 한 곡을 장착하고 있다는 자신감이 노래방 가는 길을 조금은 가볍게 한다. 노래를 시켰을 때의 주저함이나 두려움도 어느 정도는 극복하게 해 주었다. 여전히 노래 잘하는 사람에 비하면 많이 부족함을 인정한다.
음치는 몸치도 피할 수 없는 숙명인지 춤도 젬병이다. 학창 시절 뒤풀이로 나이트클럽 가는 게 유행이었다. 이태원의 알만한 나이트는 거의 순회했다. 바텐더 보조로 일하던 친구 덕분에 초저녁부터 새벽까지도 놀았다. 춤은 노래보다 조금 출만했다. 다행히 박치는 거의 모면한 듯했다. 문제는 나무토막처럼 뻣뻣한 몸뚱이였다. 삐걱대는 키 큰 나무인형이나 다름없었다.
개인적으로 운동신경은 인정받고 있다. 모든 운동을 좋아하고 기본 이상은 한다. 불행하게도 춤은 운동이 아니다. 춤은 율동이다. 리듬에 맞춰 춰야 한다. 리듬은 타는 데 몸이 안 움직인다. 몸치는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올해 3월부터 드럼을 배우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 바라만 보고 있었던 거대한 장벽을 넘고 싶었다. 록 밴드의 공연을 보면 나의 시선은 늘 드럼에 고정됐다. 맨 뒤에 앉아 스틱을 휘두르며 박자에 맞춰 거침없이 연주하는 드러머의 모습은 동경의 대상이었다.
문득, 새해가 되면서 드럼을 배우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 욕망에 불을 댕긴 건 아내와 아들, 딸이었다. 아내는 말했다. "당신은 절대 '박치'가 아니니 도전해 봐요. 잘할 수 있어요." 모든 악기를 잘 다루며 절대 음감을 가지고 있는 아들은 말했다. "악기를 연주하는 것은 타고난 것이 아니에요, 아빠도 꾸준히 연습하시면 충분히 잘하실 수 있어요." 대학 밴드에서 베이스를 연주하며 먼저 드럼을 배웠던 딸이 말했다. "드럼은 아빠하고 잘 어울리는 악기 같아요. 파이팅!"
드럼 수업은 매주 목요일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진행된다. 지금까지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앞으로도 이 시간만큼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아직 서툴고 어설프지만 악보를 볼 줄 알고 박자를 맞춰 가고 있다는 게 신기하다. 할수록 재밌고 자신감도 생긴다.
음치의 설움과 몸치의 아픔을 딛고 박치를 극복하기 위한 여정이 즐겁다. 그 길에 날개를 달았다. 아내가 마음껏 연습하라며 '드럼'을 사 주었다. 2평의 좁은 서재 방을 다시 정리하며 드럼을 정중히 모셨다. 꿈만 같다. 2평에서 누리는 행복과 풍요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더 소중한 가치가 되었다.
오늘도 나는 틈만 나면 악보를 보고 스틱을 잡으며 드럼을 친다. 매끄럽지 않던 마디마디가 자연스레 이어질 때까지 두드린다. 박자가 들어맞아 온전한 곡이 연주될 때까지 노력한다. 가족밴드를 만들어 공연하는 그날까지!!!
드럼 연주와 글쓰기는 한 통속인 듯하다. 하루라도 빼먹지 않고 연습하며 한 줄이라도 써내는 꾸준함이 필요하다. 안 되는 부분은 두드리고 두드린다. 안 써지는 부분은 쓰고 또 고쳐 쓴다. 악보를 보고 두드리다 보면 자연스레 연주가 되는 순간이 온다. 주제에 집중해 쓰다 보면 어떻게든 문장이 이어진다. 온전히 한 곡을 연주할 때까지 두드리고 두드린다. 충분히 한 주제를 내놓을 수 있을 때까지 읽고 또 읽으며 수정하고 다듬는다.
드럼 연주에 완성은 없다. 글쓰기에도 만족은 없다. 드럼을 연주할 수 있어 마냥 좋다. 글을 쓰는 순간도 마찬가지다. 이 두 멋진 행위를 한 공간에서 할 수 있어 더없이 행복하다.
안 되는 건 없다. 자신이 하고 싶은 걸 찾아내고 도전한다면 모든 게 가능하다. 더불어 이젠 그 어떤 것도 억지로는 하지 않을 당당함과 자신감이 차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