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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담 Jul 09. 2024

비가 새지 않아 감사한 날들

장마 기간 모든 생명이 무탈하길

장대 같은 비가 쏟아진다. 소리만 들어도 물 폭탄이다. 또랑을 흘러가는 물도 금세 불어난다. 사방이 비에 흠뻑 젖었다. 비가 쏟아지는 날이면 습관처럼 새는 곳이 없는지 확인하게 된다. 비가 새는 곳에서 살았던 아찔하고 난감하며 무력했던 기억 때문이다.


20대 초반, 복학을 하면서 자취를 시작했다. 서울이란 도시에 나만의 공간이 생겼다는 사실만으로도 마냥 좋았다. 학교에서 10분 정도 거리였다. 본채와 아래채 사이를 이어 만든 4평 정도의 작은 골방이었다. 싱크대와 세면대를 같이 썼다. 불편했지만 거뜬히 감수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마가 시작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천장에서 비가 샜다. 똑똑 떨어지는 물소리는 심란했다. 바닥에 양동이를 댔다. 비상 대책을 세웠다. 천장 물 새는 곳에 통 비닐을 붙여 주방 싱크대로 물이 빠지게 했다. 비닐로 물이 흘러가는 것을 보면서 밥도 먹고 잠도 잤다. 겨울엔 더 큰 위기가 찾아왔다. 생애 가장 추운 겨울을 보냈다. 보일러가 고장 나 거의 한 달을 차디찬 바닥에서 솜 이불을 겹겹이 덮고 잤다. 집주인은 나 몰라라 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 방은 불법 건축물이었고 결국 보증금마저 찾지 못하고 나왔다. 천만 도시 서울은 시골 촌놈에게 제대로 된 쓴맛을 보여 줬다.


신혼 초, 조그만 아파트에 전세로 들어갔다. 편하게 오래 살라고 하던 주인은 2년의 전세 기간이 끝나자마자 나가 달라고 했다. 아파트보다 주택을 좋아했던 우리는 단독주택 2층에 들어가게 됐다. 계단은 조금 경사가 있었지만 방 3개에 거실과 넓은 베란다까지 꽤 괜찮은 집이었다. 이곳에서도 장마는 예사롭지 않은 손님이었다. 비가 많이 오자 거실 천장에서 비가 샜다. 어이가 없었다. 아내에게 미안했다. 아들도 돌을 지나 사방팔방 휘젓고 다닐 때였다. 주인에게 말했지만 집이 낡아 전체를 손보지 않으면 누수를 완전히 잡을 수 없다며 임시방편으로 지붕에 비닐을 덮었다. 결국 비닐집이 되었다. 그곳에서도 2년을 살지 못하고 나왔다.


귀농 후, 운 좋게 지금 살고 있는 집을 만났다. 전망 좋은 곳에 자리한 시멘트 기와에 블록으로 지은 집이다. 오래된 집을 새롭게 수리했다. 어긋난 지붕의 기와도 맞추고 처음 몇 년은 별 탈이 없었다.

5년여쯤 지나 장마가 시작되고 많은 비가 내리자 불길한 징조가 나타났다. 천장에 물이 고였다. 벽지가 물을 머금어 아래로 늘어졌다. 건드리면 톡 하고 터질 것만 같아 불안했다. 들어찬 물은 빼지 않으면 마르지 않았다. 살짝 구멍을 뚫어 대야로 물을 받아 냈다.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비만 오면 물은 벽지 사이로 번져 나갔다. 뚫린 구멍에서 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다양한 미봉책으로 새는 곳을 막으며 지냈다.

물은 자비가 없다. 빈틈만 보이면 여지없이 스며든다. 원천적으로 막지 않으면 조금의 틈만 있어도 흘러들고 모여들었다. 옷을 보관하는 방에서부터 시작된 누수는 부엌과 욕실로 범위를 넓히며 쏟아지기 시작했다. 또다시 아내와 아이들 볼 면목이 없었다. 대대적인 지붕 수리 작업을 계획했다. 기술자에게 맡기면 되지만 인건비가 엄청났다. 직접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여러 곳에서 정보를 수집하고 지붕 수리 현장을 답사하며 연구했다. 몇 해 전, 장마 예보를 열흘 앞두고 지붕 수리 작업에 착수했다. 인부는 아내와 아들, 딸. 과감하게 기존의 시멘트 기와를 걷어내고 각재로 틀을 짠 뒤 강판으로 된 지붕 자재를 얹었다. 보수 공사에 소요된 시간은 일주일. 공사가 끝난 다음날 밤, 비가 쏟아져 내렸다. 아내와 나란히 누워 두 눈과 귀를 천장에 고정시켰다. "비 새는 거 보여?""물 떨어지는 소리 들려?" "아니, 하나도 안 보이고 안 들려" "우와, 만세!"

그날 이후 집에서는 더 이상 비가 새지 않았다.


지금도 비는 그칠 줄 모른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퍼붓는다. 야속하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게 물이요, 추운 겨울밤을 지새는 것만큼 서러운 게 비가 새는 집에 사는 삶이다.

생각해 보니 삶의 전환점에서 맞이했던 보금자리들이 모두 비가 샜다. 아내는 비가 새지 않은 집에 사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며 웃는다.


지붕 없는 집에 사는 새들은 모두 어딘가로 대피했다. 외출도 삼가고 소리도 내지 않는다. 배고픔을 견뎌낼 방책은 마련해 두었으리라 믿는다. 새들에게도 메마르고 황량한 겨울과 장마는 고역이다. 천지사방 거침없이 내달리던 고라니도 어딘가로 숨어들었다. 빗소리를 이겨 내려는지 개구리들의 합창은 더욱 크게 울린다.


여전히 장맛비는 내리고 비 예보는 이어진다. 간절한 바람 하나 있다. 세상 어느 곳에든 비가 새는 집이 없기를, 비가 내려 위험해지거나 우울해지는 이웃이 없기를 염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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