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괜찮은 삶을 위한 소망
생의 남은 시간을 모른다. 남은 시간을 모른다는 사실을 알기에 그 시간 앞에 숙연해진다. 주어진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으려 애쓴다. 아득했던 시간들이 삶의 경계마다 또렷하게 되살아 난다. 벌써 그때가 돼 버린 날들은 자꾸 뭔가를 알려주려 발버둥 친다. 따라가지 못하는 더딘 삶의 무게는 여전히 버겁다. 감정이나 치우침 없이 다가온 시간은 앞으로 가야 할 방향과 이루어야 할 목표를 다그치듯 일러준다. 무겁고 복잡하며 어려운 길은 가지 말라 한다. 가볍고 단순하며 쉬운 길만 가도 충분하다고 일러준다.
그 길이 어떤 길인지 가만히 생각해 본다.
아무 조건 없이 주어진 시간을 누린다. 무얼 하든 서두르지 않는다. 애태우면서 기다리지 않는다. 해가 뜨고 지는 시간을 먼저 몸으로 받아들인다. 재촉하는 무엇도 없다. 눈앞에 펼쳐진 풍광을 온전히 담아도 시간이 남는다. 하루가 걸림 없는 바람처럼 유유히 흘러간다. 그런 어느 날, 불현듯 시간이 나를 데리러 온다. 홀가분하게 따라나선다.
오고 가는 길에 서두를 필요가 없다. 어디를 가야 한다는 약속도 없다. 모든 길이 느긋하다. 가다 돌아와도 뿌듯하다. 가고 안 가고는 그날의 마음에 달렸다. 가도 그만 안 가도 그만인 길이다. 그러다, 꼭 가야만 하는 어느 길 하나를 만나면 홀가분하게 떠난다.
버리는 게 거의 없는 생활이다. 쓰레기봉투가 필요 없다. 사고 싶은 것은 없고, 사야 되는 것이 적으니 당연하다. 지구와 다음 세대를 위한 작은 실천으로 남은 시간을 보낸다. 마지막 순간,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다는 사실을 살아 있는 동안 늘 새겨야 한다. 가져갈 수 없기에 남겨 놓아서도 안된다. 홀연히 홀가분하게 지는 삶은 남은 사람들에게 베푼 마지막 호의다.
관계의 복잡함과 수고로움을 미련 없이 내려놓는다. 애써 누군가를 찾지 않는다. 기다리지도 않는다. 만나고 싶으면 '보고 싶다' 전화 한 통으로 마음을 전한다. 온다 하면 오라 하고 오라 하면 어느 날 간다고 말한다. 오고 가는 만남도 자연스러워 편안하다. 인연이란 스치듯 흘러가는 바람 같다. 누구를 구속하거나 얽매이지 않는다. 더 이상 아무도 만날 수 없을 때는 이미 먼 길을 떠난 뒤다.
어떤 직책이나 책임도 맡지 않는다. 그 무게를 감당할 힘이 부족하고 능력의 한계도 다했음을 인정한다. 훈수질을 경계한다. 그저 말없이 지켜보며 더 깊은 뜻과 지혜를 전달한다. 기어이 도움을 청하면 질문하고 질문한다. 물어서 답을 찾게 한다. 더 이상의 참견은 주접이다. 떠나고 없어도 아무 문제 없는 자리라 홀가분하다.
돈은 딱 필요한 만큼만 있다. 갚아야 할 빚이 하나도 없다. 신세 졌던 누군가에게는 서운하지 않을 만큼 보답을 했다. 넉넉하지 않지만 손자, 손녀에게 줄 용돈벌이는 하고 있다. 하루 생활비는 거의 들지 않는다. 자급자족을 위한 소일거리는 놓지 않는다. 흙을 밟고 서야 건강하다. 먹는다는 게 꼭 살기 위한 것만은 아님을 알게 됐다. 자연스레 양이 줄고 건강한 먹거리로 만족한다. 먹는 시간은 또 다른 휴식과 여유로 맞이한다. 느긋한 채움은 조금으로도 가득한 포만감을 불러온다. 마지막 여행을 위한 여비는 마련해 두었다.
거처는 단출하다. 꿈꾸는 공간은 단열과 방수가 잘 된 15평이면 족하다.
조그만 부엌 1.5평. 화장실 1평. 서재 겸 음악 감상과 드럼이 놓인 3평. 침실 2평. 옷방 1평. 거실 3평.
또 하나의 작은방 2평. 다용도실 1.5평!
아내의 공방은 별도로 마련했다. 먼 훗날 집이 허물어질 때 아무것도 버릴 것 없는 그런 집. 떠나고 남아도 애물단지가 되지 않는 집. 팔아도 별로 돈이 되지 않는 집. 그 집에서 잠들 듯 떠나는 축복을 누리면 그만.
생각만으로도 마음속에 무언가가 가득 찬다. 채우기 위해 비우고 지운다. 멈추고 줄여서 가득 채운다. 남은 시간의 채움은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다. 꿈꾸는 삶의 방향은 이루고 싶은 소망으로 남겨 두는 게 아니라 이미 이룬 듯 실천하고 다짐하면 된다. 가득 찬 삶은 비움의 시간을 통해서 완성된다.
버리고 갈 것도 없어 참 홀가분한 마지막을 꿈꾼다.
남은 시간을 알지 못해 조금은 마음이 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