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고 없는 낯선 마을로 들어와 맨 처음 알게 된 분이 김씨 아저씨다. 집은 개울 건너지만 일터인 농장과 아저씨의 논밭이 붙어 있어 자주 만났다. 아저씨는 낮은 목소리로 마을의 이력과 주민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그 이야기 속에는 아저씨의 가족사도 양념처럼 버무려졌다.
아저씨는 농촌의 근대화, 산업화와는 거리가 먼 농부다. 논은 보기 드문 다랑이 논이다. 밭은 산비탈의 경사진 곳에 있다. 모든 일에 서두르는 법이 없는 그의 일상은 느리지만 꾸준하다. 일하는 속도, 새참 먹는 시간, 일꾼들과 함께하는 날도 급할 게 없다. 일정한 속도가 가장 큰 힘이란 걸 온몸으로 증명한다.
아저씨의 친구는 오래된 나무 지게, 끝이 둥글어진 삽, 손잡이가 반질반질한 괭이, 무뎌진 톱, 투박한 조선낫, 그리고 색 바랜 장화와 소주 한 병이다.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지게를 가장 늦게까지 지고 다니셨다. 삽은 둥글었지만 흙을 고르고 파내는 데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속도와 양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녹이 슬어 나무를 자를 수 있을까 걱정되는 톱도 아저씨의 손에서는 제 역할을 다한다. 나무가 잘릴 때까지 톱질을 멈추지 않는 끈기 때문이다. 괭이자루가 반질반질한 것은 그 무수한 괭이질에도 자루가 부러지지 않았다는 증거다. 힘들이지 않고 땅을 파서 밭을 일구는 진짜 농부다. 푸른 장화도 색이 바랬지만 물이 새지 않아 아무 문제 없다. 일상에 가장 친한 벗인 소주가 함께 했다. 새참으로 소주를 드실 때마다 손짓하며 부르신다. 술 한잔 못하는 나는 말동무만 돼 드렸다.
아저씨의 손이 닿으면 낙엽은 퇴비가 된다. 수북이 쌓여 있는 참나무 잎을 커다란 포대에 긁어 담는다. 어깨에 둘러메고 조심스레 옮긴다. 구석구석 빠진 곳 없이 논에 흩뿌린다.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 긁어모으는 속도 보다 낙엽 쌓이는 시간이 더 빠르다.
비료 포대는 허수아비가 되고 돌멩이는 튼튼한 둑이 된다. 기술이 뛰어나 지역 곳곳에 아저씨가 쌓아 놓은 돌담이 남아 있다. 나뭇가지는 고추 말뚝이나 울타리의 설치 예술이 되며 온기를 불러내는 땔감이 된다. 나무와 돌은 꼭 필요한 무엇이 된다. 서두르는 법 없는 그의 손은 늘 마법을 부린다. 그의 시간은 노동을 예술로 승화시킨다. 그 감각의 비결은 이론으론 설명하기 힘든 농부의 삶에 있는 듯하다.
아저씨의 운송 수단은 옛날 양조장에서 술독을 실어 나르던, 지금은 민속 박물관에나 있을 법한 검은색 화물 자전거다. 휑하니 지나가는 사람들을 무안하게 만드는 속도로 읍내를 오간다. 속도가 느려진 게 아니라 세상의 속도가 빨라졌을 뿐이다.
나이차가 20여 년이 넘는데도 형님이라 부르란다. 세월을 떠나 짊어지고 온 삶의 무게가 그 곱절은 되는 데 그럴 순 없다. 아저씨라고 하면 서운해하신다. 면전에서는 거의 호칭을 부르지 않았다.
몇 해 전부터 느리고 여유롭던 그의 일상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해 질 녘 집으로 향하는 오르막길, 화물 자전거를 끌고 가며 부르던 구성진 노랫가락도 들리지 않았다. 오고 가는 길에 마주할 수 없는 날들, 지난가을 낙엽도 켜켜이 쌓여 있고 겨울을 지나 온 밭 주변의 앙상한 나무와 검불도 그대로다. 가지런히 놓여 있어야 할 고추 말뚝도 어지럽게 누워 있다. 다시 새봄을 맞이하는 들판 어디에도 아저씨의 조곤조곤한 발걸음은 닿지 않았다.
견고한 돌담과 바람의 장단에 춤추는 허수아비는 그대로인데 아저씨는 오래 보이지 않는다. 함께 했던 친구들도 더 빠르게 녹슬고 부러지며 고장 나 멈춰 섰다. 그의 논과 밭도 덩달아 거칠고 투박해졌다.
날마다 함께 했던 술이 부지런하면서도 꾸준한 그를 멈추게 했다. 마음 한편에 꾹꾹 눌러 놓고 차마 꺼내지 못했던, 모질고 답답한 날들을 지탱하게 해 주며 위로해 주던 소주를 더 이상 가까이할 수 없게 되었다. 손에서 놓을 수 없었던 그 술이 세월보다 먼저 병을 데리고 왔다. 읍내 주점으로 술친구를 만나기 위해 타고 나갔던 자전거도 마당 한편에 세워져 있다.
해 질 녘 한 짐 가득 나무 지게를 지고 집으로 향하는 뒷모습은 노동의 고단함과 농부의 소박함을 담아낸 한 폭의 풍경화였다. 그렇게 아저씨는 저문 들판 논두렁길로 점점 멀어져 갔다.
농부의 한 시대가 저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