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러온 돌 박힌 돌
우리는 좁은 땅에 살고 있다. 도시에서는 오밀조밀 빈틈없이 모여 있어도 서로가 서로를 모른 체 살아간다. 그래도 아무 문제가 없다. 시골은 옹기종기 어우러져 사는 듯해도 원주민과 이주민의 간극이 존재한다. 농촌지역 특유의 정서와 문화, 전통과 관습등의 영향 때문인 듯하다. 물론 외부인에 대한 편견과 거부감 없이 조화를 이뤄 오손도손 살아가는 곳들도 많다. 문제는 여전히 상존하는 배타적 관계의 공고함이 서로에게 상처가 되고 벽이 되어 원활한 정착과 공존에 걸림돌이 된다는 것이다.
마을에 들어왔을 때 처음부터 살갑게 대해주시던 분들이 계셨다. 집수리 하고 있을 때 수시로 찾아와 여러 조언도 해 주셨다. 마을 이장도 8년이나 했다. 격의 없이 가깝게 지냈다. 당연히 마을 토박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다른 마을분이 그분들을 가리켜 들어온 이들이라 했다. 이 마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믿기지 않아 언제 들어왔냐고 물었더니 30여 년 전에 옆 군소재지 경계에서 이사 왔다고 한다.
대대로 뿌리를 내리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으리라 여기면서도 놀라웠다. 이 마을에서 태어나지 않으면 어차피 들어온 이라는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나는 15년 전에 들어온 이다.
마을 총회에 나갔다. 처음 참석한 분이 계셨다. 연세가 많아 보이셨다. 유난히 큰 목소리로 좌중을 휘어잡고 계셨다. 마을 분들 대부분이 공손한 태도로 경청하고 있었다.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이장님에게 저분이 누구시냐고 물었다. 마을 형님이라고 했다. 처음 뵌 분이라고 했더니, 15세에 마을을 떠나 55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토박이라고 했다. 그렇다. 15세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나 반백년이 넘어 귀향한 분과 40대에 낯선 마을로 들어와 15년을 살고 있는 사람은 근본이 다르다. 어차피 나는 들어온 이, 그분은 엄연한 토박이임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다른 면소재지에서 살다가 20여 년 전 장사를 위해 읍내로 이사 온 사람이 있었다. 동네에서 가게를 운영하며 이웃들과 살갑게 지냈다. 새로 이장을 뽑는 선거에 출마했다. 바로 거부당했다.
가까운 옆 동네에서 이사를 왔는 데도 토박이가 아니라는 이유로 이장의 자격이 안된다는 것이다. 할 말이 없었다. 물론, 모두 그런 것은 아니다. 어떤 마을은 오히려 귀농인이나 귀촌인들을 이장으로 선출하여 마을을 위해 봉사하게 한다.
귀농, 귀촌인들은 여러 문제에 적극적이다. 지역현안에 민감하고 참여율도 높다. 몇 해 전 자치단체장의 친일 발언과 독단적 군정운영에 대한 군민들의 불만이 고조되어 주민소환운동이 일어났다. 많은 군민들이 뜻을 모았지만 앞장서서 나선 일꾼들은 귀농, 귀촌인 들이었다. 그때 한 지역신문에 칼럼이 실렸다. 제목은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뽑는다'였다. 해당신문의 기자가 기고한 글이다. 별일도 아닌 걸로 굴러 들어온 사람들이 여론을 조장하고 주민들을 부추겨 일 잘하는 군수를 몰아내려 한다는 내용이었다. 지역 언론인의 한심하고 저급한 인식과 판단에 어이가 없었다. 타지에 살고 있는 자신의 자녀들이 그곳에서 굴러온 돌 취급을 받고 있다면 어떤 마음일지 묻고 싶었다.
주위를 둘러보면 대부분이 고향을 떠나 타향 객지에서 각자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 모두가 살아가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다. 그곳이 어느 곳이든 사람들은 자유로이 떠나고 머무른다. 다시 또 떠나가며 정착하기를 반복한다. 모두가 우리의 자녀들과 일가친척, 친구들이다. 어디에 살고 있든 편견과 차별 없이 따뜻하게 품어주고 다독여 주는 인정과 어우러짐이 필요한 이유다. 내가 있는 곳에 다른 이의 소중한 아들 딸이 들어와 있고, 나의 아들 딸도 누군가의 고향에서 열심히 살고 있다. 글러온 돌도 박힌 돌도 어우러지면 한 곳에 있는 돌무더기다. 태어난 곳이 고향이라지만 지금 살고 있는 그곳도 삶의 굽이 굽이에서는 정든 고향이 된다. 도시보다는 시골에서의 삶이 더 그렇다.
너나없이 포용해 주는 어머니 같은 마음들이 더욱 그리워지는 시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