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과 마음의 자유와 평온을 위한 용기
시골에 내려와 살면서 자연스레 몇 가지 다짐을 하게 되었다. 다짐들이 굳건해 흔들림 없이 지켜지는 건 아니지만 늘 마음에 새기며 다듬고 실천하려 한다. 그렇다고 세상을 살아가는 특별한 지혜나 요령은 아니다. 그냥 몸과 마음의 자유와 평온을 누리기 위한 나름의 방편일 뿐이다. 이기적이거나 자기중심적 사고 일 수도 있지만 중요하지 않다. 이런 다짐들이 나를 위한 시간과 공간을 더 밀도 있고 가치 있게 채워 주는 건 분명하다.
서툰 다짐 몇 가지 적어 본다.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는다. 끌려가거나 따라가는 일도 하지 않는다. 어떤 요구나 유혹이 있어도 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않는다. 하고 싶어도 자발적이고 주도적이지 않으면 하지 않는다. 함께 하자는 제안에 처음부터 대 놓고 거절하지는 못하지만 궁극에는 하지 않는다. 함께하지 못함으로 멀어질 관계라면 오히려 그쯤에서 멈추는 게 서로에게 좋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산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게 되면서 하기 싫은 일은 더욱 하지 말아야 함을 생각한다. 지금은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아가기에도 부족한 시간이다.
가고 싶지 않은 곳엔 가지 않는다. 시골에서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많은 모임과 행사가 끊임없이 이어진다. 모두 찾아다니다 보면 정작 중요한 일은 뒷전이다. 해야 할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그마저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다. 처음부터 단체 활동은 최소화했다. 시간과 돈이 많이 들어가는 모임은 일단 사절이다. 봉사 단체도 가입하지 않았다. 부족하지만 조용히 혼자 봉사하고 도움을 주면 더 가치 있고 보람 있다. 굳이 가지 않아도 되는 곳에 가서 힘들고 지루한 시간을 보낼 이유가 없다. 앞으로도 가야 할 곳과 가지 말아야 할 곳의 기준과 방향은 명확하다.
모든 행사에는 지역의 높으신 분들이 과장된 웃음과 표정으로 등장한다. 한껏 격식을 차리고 끊임없는 악수로 반가움을 표시한다. 대체 누구를 위해 일하는지 늘 궁금한 분들이다. 무엇을 위해 지금의 모습을 유지하려 하는지 어느 정도 가늠은 된다. 속이 훤히 드러나 보이는 그들의 언행을 삐딱한 나는 바로 보지 못한다. 그래서 그런 자리를 정말 싫어한다. 장황하면서도 앵무새 같은 격려사와 환영사, 축사와 기념사는 더욱 감내하기 힘들다. 왜 그들의 자리는 늘 맨 중앙의 앞자리여야만 되는 지도 의문이다. 행사의 진짜 주인공은 관계 기관의 높으신 분들이 아닌데도 그들이 대우받고 박수받으며 위세를 떤다. 그리고 그들은 일찍 자리를 뜬다. 그런 자리에 나는 절대 가지 않으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가야 할 때는 먼저 자리를 뜨거나 애써 인내심을 테스트한다.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은 만나지 않는다. 누군가를 만나고 교류하며 사는 게 사회적 동물인 사람의 기본이지만 굳이 보기 싫은 사람과 마주할 필요는 없다. 만나고 싶고 보고 싶은 사람을 판단하고 구분하는 게 지극히 주관적이지만 상관없다. 내가 만나지 않는다고 다른 사람까지 그 사람을 못 만나게 하지는 않는다.
자신만 알며 남에게 상처 주고 무례한 사람과는 자리를 함께 하지 않는다. 말이 많고 잘난 척하는 사람 곁에는 가지 않는다. 아는 척하는 사람과는 대화를 하지 않는다. 자리를 탐하는 사람과는 함께 하지 않는다. 그 사람에게 나는 자신의 자리를 채우고 빛내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속내가 뻔히 드러나 보이는 언행을 아무렇지 않은 듯 행하는 사람을 애써 받아들일 인격까지는 갖추지 못했다. 이런 사람들이 인생의 스승이다. 이들을 보며 다짐한다. 아무리 궁해도 저런 사람은 되지 말자. 좋은 사람 만나 실컷 웃고 떠들며 즐겁고 유익한 시간을 보내기에도 부족한 시간이다. 때론 아픈 누군가와 마주 앉아 위로하고 치유하는 시간도 선물 같은 만남이다.
생각할수록 나는 참 모난 사람이다. 누군가 나를 찾지 않는다면 그건 나를 위한 배려다. 누군가 나를 찾는다면 그건 나를 위한 실험이다. 나만을 위한 사소한 다짐들을 지켜가기 위해선 용기와 절제와 주관이 필요하다. 배짱도 있어야 한다. 방심하면 일상이 흔들리고 깨진다. 당당함과 담대함으로 지켜가는 시간은 더없이 값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