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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담 Mar 12. 2024

할아버지, 할머니!  가만히 불러봅니다

새삼 고맙습니다

어진 할머니, 선비 같은 할아버지와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기억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선물이었다.


만물이 소생하는 새 아침,

할머니는 하얀 무명 치마저고리에 머리를 곱게 빗어 올리시고 치성을 들이셨다.

부엌 가장자리를 깨끗하게 닦아 물 한 종지 올리시며 조왕신께 비셨다. 뒤뜰 장독대에도 물 한 종지 올리시고 터주신께 비셨다. 마지막으로 마루 중앙 기둥에 물 한 종지 올리시고 성주신께 비셨다.

집안 화목하고 자식, 손자 무탈하며 하는 일마다 술술 잘 풀리라고 빌고 또 비셨다. 할머니의 치성은 하루도 빠지지 않았다. 소박하지만 정갈하고 간절했다. 그 자체로 고결하고 숭고했다.

할머니의 그 공덕으로 오늘을 살고 있다.


할머니는 열아홉 살 때 전남 순천( 옛 승주군)에서 지리산 화엄사 아랫마을에 사는 세 살 아래 꼬마 신랑과 백년가약을 맺으셨다. 근동에 부잣집이라고 소문이 자자했다는 데, 어느 날 대 화재로 모든 것을 잃고 다시 친정이 있는 마을로 할아버지와 함께 돌아오셨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농사일에 전혀 관심이 없으셨다. 집안의 모든 일은 할머니 몫이었다. 학교 갔다 돌아오면 할아버지는 늘 마루 한가운데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책을 읽고 계셨다. 할아버지가 가까이하신 책은 '전설 따라 삼천리'라는 몇 십 권의 시리즈물이었다. 매주 TV에 방영돼 인기를 끌었던 '전설의 고향'의 원작이었다. 책가방을 던져 놓고 할아버지 옆에서 재밌는 부분만 찾아 읽었던 기억이 또렷하다. 책을 가까이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신 분은 할아버지셨다.

그런 할아버지의 가장 큰 소임은 할머니가 땀 흘려 수확하여 마당에 널어놓은 갖가지 곡식을 지키는 것이었다.

책을 보시는 사이사이에 마루에서 마당까지 닿을 수 있는 긴 대나무 막대로 멍석 위의 곡식을 탐하는 새들을 쫓는 모습은 느리지만 진중하셨다.

가오리연이 대세였던 연날리기에 할아버지가 직접 대나무 살을 다듬어 만들어 주신 방패연은 늠름하고 당당했다. 할아버지는 큰소리 한번 내신 적이 없으셨다. 약주를 드시고도 자전거를 타고 흐트러짐 없이 돌아오셨다. 할아버지는 기품 있고 꼿꼿하셨다.


나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한방에서 잤다. 어린 손자는 두 분의 사랑 속에 자라났다.

늦가을 밤, 할머니는 살며시 안방 선반 위에서 홍시를 꺼내 주셨다. 먹을게 귀하던 시절, 빨갛게 익은 홍시는 최고의 간식이었다. 동생들에게는 미안했지만 그 달달하고 부드러운 맛은 두 분의 사랑으로 곱절이 됐다.


어느 늦은 봄날, 할머니가 밭에서 김을 매고 계셨다. 도와드린다며 쇠스랑으로 풀을 뽑으려다 할머니의 손등을 찍고 말았다. 너무 놀라 울음을 터트렸다. 손이 찍힌 할머니는 아픈 표정 하나 없이 연신 괜찮다고 하셨다. 집에 오셔서도 손자를 감싸며 본인이 실수로 다쳤다고 둘러대셨다.

할머니는 병원에 가시지 않고 민간요법으로 치료를 하셨다. 선인장인 백년초를 짓이겨 상처 부위에 바르고 붕대로 감으셨다. 치료하실 때마다 곁에서 지켜보았다. 놀랍게도 상처는 빨리 아물었다. 할머니의 민간요법 재료는 참기름, 치자 열매, 벌꿀, 설탕물, 밀가루와 거미 등이었다. 그중 최고의 치료제는 할머니의 다정한 손이었다.

할머니는 못하는 게 없으셨다. 전통음식에도 조예가 깊으셔서 명절이나 동네잔치 때는 늘 할머니의 음식 솜씨가 빛을 발했다. 그런 할머니가 자랑스러웠다.  


한가한 오후, 나른한 햇살이 마루 깊숙이 내려앉을 때 누워 계신 할머니의 귓밥을 파 드렸다. 고사리 손으로 귓밥을 파는 손자가 귀엽고 대견하셨는지 할머니는 미소 지으시며 즐거워하셨다.


두 분은 늦은 나이에 삼 남매를 두셨는데 막내아들인 아버지를 마흔여섯에 낳으셨다.


일을 모르시는 할아버지로 인해 팍팍하고 고달픈 날들이었지만 할머니는 늘 단아하고 귀품 있는 모습이셨다.

그날도 나는 마당에서 놀고 있었다. 할머니는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고 계셨는데 갑자기 할머니의 몸이 한쪽으로 기울어지셨다. 황급히 안방으로 모셔진 할머니는 반듯하게 누우셨다. 할머니는 며칠 후 모든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고요하고 평안하게 눈을 감으셨다. 어린 손자에게 할머니의 죽음은 충격과 슬픔보다는 아득하면서도 끝이 아닌 이별로 다가왔지만 늦둥이 막내였던 아버지의 그치지 않는 곡소리가 할머니의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이게 했다.

건강하시던 할아버지도 할머니와의 이별 후 부쩍 외로워하시더니 몇 개월 뒤 홀연히 할머니 곁으로 떠나셨다.

다정다감은 아닐지라도 한평생 살가운 부부의 정이 그만큼 깊으셨던 듯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어릴 적 두 분과 함께 했던 소중한 순간들은 진한 흑백 필름으로 되살아나 오늘을 살찌우는 자양분이 되고 있다.  그 영상의 줄거리를 펼쳐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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