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영어를 못한다. 학창 시절 공부도 안 했을뿐더러 딱히 관심이 없었다.
첫 아르바이트를 편의점에서 했는데, 위치는 학원가였다. 학원가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원어민 선생님들이 주 고객이었고, 매우 긴장했다. 학습지로, 단과학원으로 영어를 배웠지만 영어를 할 줄 모르는 딸. 철없는 낙하산 알바생은 그 무엇보다도 엄마한테 영어를 못해서 혼나는 게 걱정이었다. 그렇다. 편의점 점장님은 우리엄마였다.
엄마는 눈치가 빨랐다. 어느 날, 한 외국인 여성이 냉장고에서 아이스크림을 들고 난처하게 바라보았다. "아, 그거? 우유 들었냐고? 잠시만!" 하고 달려갔다. 외국인 여성은 단골 고객이었으며, 그녀는 베지테리언이었다. 그녀는 영어로, 엄마는 한국어로 소통을 꽤 원활하게 했다. 우리 엄마는 "이거는 과일 맛! 이렇게 생긴 거는 우유가 들어서 못 먹어!" "아니. 그거는 베지테리가 먹을 수 없다니까?" "이거를 먹으려면 우유를 먹는 거야. 밀크. 밀크도 안된다며. 노!" 이런 식으로 대화를 이끌었다. 그녀는 엄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으며, 엄마가 추천하는 아이스크림을 구매했다.
나는 자랑스러운 우리 엄마의 딸로서 그때 깨우쳤다. 영어? 그딴 거 필요 없다. 소통은 기세다!
첫 여행지는 일본이었다. 아무리 기세라고 해도 일본어를 안 쓰고 일본에서 소통을 하기에는 큰 어려움이 있었다. 당시에 할 줄 아는 일본어는 '아리가또', '도조' 두 개였다. 아리가또라고만 말하는 건 무례하다고 하던데, 그때는 그런 것도 몰랐다. 도조는 왜 아느냐. 고등학생 때 일본어 선생님께서 "너네 공부 안 할 거지? 일본 가면 무조건 '도조'라고만 해. 그럼 다닐 수 있어!" 이 말만 믿고 일본에 갔다.
도쿄에 도착했다. 바쁘지만 조용한 곳이라고 느꼈다. 내가 누군가에게 길을 묻고 싶어 눈을 마주치면 젊은 일본인들은 눈을 피하기 바빴다. 보이는 길을 무작정 걸어 다니다가 짐보관을 하러 지하철역 락커 앞에 섰다.
역무원도 나를 도와줄 수는 없었다. 묻고 싶었지만 그도 나도 우리가 서로 대화가 안 될 거라는 걸 서로의 눈짓으로 알아버렸다.
그때, 나와 눈이 마주친 외국인. 그 아저씨는 사람 좋게 웃고 있었다. 나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신호였다.
"익스큐스뭬!" 호기롭게 외쳤다. 다음 말은 할 줄도 몰랐다. 내가 알고 싶었던 건 '락커를 어떻게 여느냐'였다. 나는 락커를 탕탕 쳤고, 그는 영어로 대답해 줬지만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는 차분하게 손으로 불빛을 가리켰다. 락커에는 두 종류의 불빛이 들어왔다. 초록색과 붉은색. "아~ 그린! 오케이?" 그는 방긋 웃어줬고, 맞다고 영어로 대답했다. "땡큐!!!!!!" 그는 나의 신이었다.
그날 나는 도쿄의 한 호텔에서 묵었고, 다음 날 아침 조식을 먹으러 호텔 식당에 갔다.
뭘 먹을지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흑인 여성 한 분이 가운데 서서 우렁찬 목소리로 "Where's the milk?"라고 외쳤다. 많은 일본인들이 있었지만 조용했다. 내가 생각했을 때, 그곳에서 외국인은 그녀와 나 둘 뿐인 것 같았다. 나는 꽤나 오지랖이 넓은 사람으로서 도움을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에 살짝 짓눌렸다.
그래도 용기를 내서 빨리 그녀에게 우유가 있는 곳을 알려줘야겠다고 생각했고, 그녀의 앞으로 걸어가 그녀의 손을 맞잡고 우유 쪽으로 직접 손가락을 뻗어서 알려줬다. 그녀는 나를 향한 칭찬을 시작했다. 잘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우렁찬 목소리로 저 귀여운 여자애를 좀 봐. 너무 고마워. 너는 천사야. 등 인생에서 들을 수 있는 칭찬은 그때 다 들었다.
나는 슬슬 즐기기 시작했다. 영어? 꽤 어렵지 않은데? (영어를 한 적이 없다) 외국인이랑 대화? 별반 다를 거 없는데? (그들도 그렇게 생각할지는 모르겠다)라고 생각하며, 일본이 아닌 다른 나라도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