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가 꼭 알았으면 하는 말 1 [가엾다]
작년 여름, <남극이 파괴되고 있다>라는 책을 구입해서 읽었다. 지구온난화가 무엇인지, 왜 일어나고 있는지, 그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다는 것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저 일상생활에서 체감하지 못할 뿐. 그런데 작년부터 이게 꽤나 심각하다는 걸 몸소 느꼈다. 한 달 넘도록 이어진 장마, 찌는 듯한 폭염, 시시때때로 몰아닥치는 태풍까지. 극단적인 날씨가 계속 이어졌고 일상생활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살림과 육아를 하고 있었기에 날씨에 더욱 예민해졌던 것 같다. 긴 장마로 빨래에선 늘 꿉꿉한 냄새가 났고(아직 우리 집엔 건조기가 없다), 폭염으로 인해 24시간 에어컨을 풀가동할 수밖에 없었다(나는 견딜 만했지만 아이가 도저히 견디지 못했다). 폭우와 폭염은 바깥 활동을 제한하였고, 코로나로 인한 우울감이 더욱더 증폭되는 듯했다. 그래서였을까. SNS를 통해 <남극이 파괴되고 있다>는 책을 알게 되었고, 주저 없이 동네 책방을 들러 책을 주문했다.
이 책은 환경저널 사진 저널리스트인 후지와라 고이치 작가가 쓴 책으로, 현재 남극의 모습과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펭귄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예쁘고 귀여운 일러스트 대신 사진을 통해 남극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는데, 꽤나 안타까운 사진들이 많다. 책의 초반부에는 남극의 아름다운 장면들이 가득 펼쳐진다. 아무 생각 없이 감상할 만큼 아름답다. 그러다가 책의 중반부에 들어서면, 피를 흘리며 죽어 있는 펭귄이 나타난다. 이때 적잖이 당황했다. 남극과 북극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상을 접한 적은 있지만, 멈춰진 사진 장면을 맞닥뜨리니 두려움이 쓱 밀려왔다. 책의 후반부로 넘어가면 불쌍하고 가여운 펭귄 대신 남극을 여기저기 채운 크고 작은 쓰레기들이 펼쳐졌다. 고철, 플라스틱, 유리조각 등이 널브러진 장면을 넘기다 보니, 펭귄과 지구에게 미안한 감정이 물 밀듯 몰려왔다.
그날 저녁, 아이와 함께 책을 펼쳤다. 고작 세 살이었지만 내가 느낀 감정과 지금의 현실을 알려 주고 싶었다. 아이는 세 살답게 털이 뽀송뽀송 난 아기 펭귄을 아주 예뻐했다. 엄마 품에 꼭 안겨 있는 아기 펭귄을 보면서 “귀여워”라고 말하며 연신 뽀뽀해 주었다. 나는 아이가 이해하든 이해하지 못하든 이야기를 해 주었다. 펭귄은 얼음이 많은 아주 추운 곳에 산다고, 그런데 쓰레기(당시 ‘지지’라는 표현을 썼다) 때문에 펭귄 집이 없어지고 있다고, 집을 잃은 펭귄에게 쉴 곳이 없다고... 한동안 얘기했다. 아이는 오로지 귀여운 아기 펭귄에게 무한한 애정을 표현할 뿐이었지만. 그 다음 날에도 계속 책을 읽고 이야기를 해 주었다. 일주일 정도 읽었을까. 피를 흘리는 펭귄을 보며 "으! 지지! 안 돼!"라고 소리쳤다. 책의 초반부, 중반부, 후반부에 각기 다르게 펼쳐지는 남극의 모습에 따라 아이의 반응도 달라졌다. 초반부에서는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갓 태어난 아기 펭귄에게 입을 맞추었고, 펭귄이 죽어 있는 중반부로 넘어가서는 입꼬리를 내린 채 쓰러져 있는 펭귄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후반부에서는 "지지, 안돼!"를 강하게 외쳐댔다.
<남극이 파괴되고 있다>는 아이가 좋아하는 최애책 중 하나가 되었고, 아이는 잠들기 전뿐만 아니라 시시때때로 책을 펼쳐댔다. 내가 인상 깊게 읽은 책을 아이도 자주 들여다보아서 뿌듯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좀 이상했다. 재미있는 이야기도 아닐뿐더러 귀여운 일러스트가 그려져 있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갖고 있는 책들 중에 사진으로만 된 책은 유일해서 시각적인 흥미를 끄나 보다 그 정도로 생각했다. 그러다 하루는 아이와 책을 읽다가 피를 흘리는 펭귄의 다리에 붙여진 '반창고'를 보고 흠칫 놀랐다. 엥? 아이는 반창고가 있는 통을 들고 와서 "내가 했어. 내가"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손가락에서 피가 아주 조금 나길래(아이는 피를 보면 엄살을 심하게 부렸다) 반창고 하나를 가져와서 손에 붙여준 적이 있었다. 그때 이런 말을 아이에게 했었다. "반창고 붙였으니 이제 피가 안 날 거야. 조금 있으면 아픈 것도 싹 사라져"라고. 그 말과 상황들을 기억했던 걸까? 펭귄의 다리에 반창고를 붙이면 다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나 보다.
그 뒤로도 아이는 펭귄을 가여워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말과 행동으로 표현했다. 어떤 날은 냉동실에 있는 각얼음을 가져와 펭귄 입에 넣어 주었고, 어떤 날은 커다란 고철을 가리키며 "내가 할 거야"라며 고철 쓰레기를 줍는 시늉을 했다. 지금도 따뜻한 물을 과도하게 켜서 물장난을 칠 때면 "그렇게 물을 많이 틀면 펭귄 집이 사라져"라고 주의를 주고, 물티슈를 많이 쓰면 "쓰레기가 많으면 펭귄이 어떻게 될까?"라고 묻는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곧장 물을 끄고, 물티슈는 내가 쓰라고 할 때만 신나서 한 장 뽑아 쓴다. 처음 이 책을 아이와 함께 읽을 때에는 아이에게 남극의 현실을 과감히 보여 주고 조금이라도 빨리 심각한 지구의 상황을 인지했으면 하는 약간의 욕심(?)이 있었다. 그래서 쓰레기 더미로 가득 찬 남극의 바다를 보면서 "안 돼"라고 외치는 것이 기특했다. 그런데 피를 흘리는 펭귄의 다리에 반창고를 붙이고, 각얼음을 펭귄에게 먹여 주고, 갈 곳 없는 펭귄에게 "우리 집에 와"라고 말하는 아이에게서 따뜻한 마음이 전해졌다. 내가 딱히 알려 주지 않았는데도 아이는 측은지심으로 펭귄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사람이 되었든 동물이 되었든 모든 생명체)를 가여워하고 그것을 아낄 줄 아는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어른인 나보다 아이가 더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차가운 머리보다는 따뜻한 마음으로 세상 모든 것을 대하는 아이로 컸으면 좋겠다. 특히나 가여운 이웃이나 동물들에게 먼저 다가가 손을 내밀고 말을 건네며, 자기 품으로 안아 줄 수 있기를. 백희나 작가의 <알사탕>을 읽으면서 혼자 노는 것이 익숙한 형에게 "나랑 놀자"라고 말하고, 마르쿠스 피스터의 <무지개 물고기와 흰수염고래>를 읽으면서는 물고기 친구들의 오해로 혼자가 된 고래에게 "괜찮아"라고 말을 건네는 마음씨를 잃어버리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