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글루 Apr 13. 2023

중력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머리를 들어 올리세요

필라테스를 시작했어요.



“네 속에는 뭐가 있어?”



 친구가 말했다. 대학 시절, 내 글을 읽은 친구의 떨리는 목소리에서는 쪼그라진 풍선 냄새가 났다. 그러게. 내 속에는 뭐가 있지? 꿈틀거리는 욕망. 가만히 눈을 감아본다. 바람. 바람이 일으킨 포말이 머리카락 끝에 닿는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파도소리.




 내가 같은 성별의 사람을 좋아하기 때문에, 내가 말을 잘 안 들어서, 내가 말썽을 일으켜서, 내가 너무 머리가 커서, 내가 괴로워서, 내가 감당이 되지 않아서. 나 때문에 힘들어서. 어느 날, 엄마는 나를 아빠에게 보냈다.



 아빠는 싱글벙글 웃으며  지내보자 했다. 아빠의 은색 어금니에 형광등 빛이 부딪혀 반짝거렸다. 속도, 철도 없고, 능력은 더더욱 없는 아빠는 작은 단칸방에서 미자인지 영자인지 하는 아줌마와 살고 있었다.

 “속옷이랑 양말은 네가 빨아야 해.”

 초면의 아줌마가 내게 건넨 첫마디. 단호한 눈빛을 한 아줌마와 그 말을 들으며 옆에서 빙글거리는 아빠라는 남자의 멍청한 웃음. 흠잡을 데 없는, 환상의 콜라보. 이제 내 인생은 좆됐다.


 뚝-하고 마음속 연결고리가 끊어졌다. 그 어느 누구의 보호도 없고, 어찌 되어도 상관없는 삶. 아빠는 이럴 때가 아니라며, 벌떡 일어나 찬장에서 소주잔을 들고 온다.

 “술 배워야지, 술!”



씨발.

17살, 처음으로 나는 모두에게서 독립했다.



-


 허리케인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자리. 뿌리 뽑힌 나무, 어디에서 날아왔는지 모를 고철, 나풀거리는 정체 모를 끈. 밝은 달빛 아래, 엉망이 된 황망한 공터 한가운데 서서 찬 바람을 있는 그대로 맞는다. 바람은 따뜻하다가 차갑다가, 폭발적으로 거세게 불어온다. 그래도 나는 날아가지 않는다. 모래 먼지가 눈을, 피부를, 가슴을 찢는다. 어디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눈을 도려낼 수 있으면, 귀를 닫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뒤를 바라보면 돌이 될 것이다.



 아빠에게 보내진지 며칠 뒤 엄마는 나를 다시 집으로 불렀지만,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빠와 마셨던 술기운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이야, 최대 여섯 잔! 그 이상은 절대 마시면 안 되겠다 너는. 하하하.”






“이제 눈을 뜨시고, 발바닥이 땅을 밀어내는 힘을 기억하세요.”


 등을 단계적으로 땅에 내려라, 척추를 분절해 보라…. 말도 안 되는 말을 듣는다. 물음표가 가득한 시간. 다시 말해보시라고, 그게 무슨 뜻인지 천천히 설명해 보시라고. 선생님과 실랑이를 벌이다 보면 한 시간이 끝난다. '필라테스'라는 나라에서만 사용하는 언어가 따로 있는 듯하다. 내가 운동 배우러 왔지 외국어 배우러 왔나? 그래. 쉽지는 않지만 필라테스의 세상에 왔으니, 여기에 적응해야겠지. 물론 나름 즐기고는 있다.


 아, 최근 필라테스를 시작했다. 잘 서있기 위해서, 잘 살기 위해서. 발맞춰 걷기 위해서. -이 와중에 여성애에 진심인 터라 여성전용 짐에서 상담받은 날, 고민 없이 덥석 등록을 했더랬다.-


 “여기 사진 보시면 이렇게 배를 내밀고 있는데, 허벅지 뒷근육이 좀 부족할 경우 이런 자세가 많거든요. 중둔근도 키워야 하고요. 이 부분을 중점적으로 한 번 교정해보려고 해요. 왼쪽 어깨도 많이 올라가 있고요. 전체적으로 밸런스가 맞지 않아요.”

 “…. 그렇군요. 네, 선생님 말씀대로 해봅시다.”

 팩트로 카운터 펀치를 얻어맞고 시무룩하게 고개 숙인 표정이 심각해 보였는지 담당 선생님이 움찔하며 위로랍시고 덧붙인다. 요즘 사람들 대부분 이 정도의 문제는 가지고 있다고.


 아빠, 잘 지내? 물론, 여전히 내 걱정 같은 것 없이 잘 지내겠지만. 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어. 요즘 사람들 대부분이 가지고 있는 문제 정도만 있대요. 그리고, 억지로 누군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필라테스를 하다가도 자연스레 삶을 배우고 있답니다.



 어느 , 가만히 앉아있는데 나도 모르게 마음이 흘러내린다. 중력 어쩌고 하는 것들 때문인가 .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린다. 그렇고 말고. 일리가 있어. 중력이 자꾸만 나를 여기에 앉히고, 자꾸만 마음을 잡아끌기 때문에 흘러내리는 것이리라.


 마음을 중력으로부터 분절해 하나씩 척척 맞추고 싶어서, 필라테스를 한다. 오늘은 중둔근을 조지려나.



이전 13화 낡고 지친 레즈비언의 이쪽 어플사용기(5)_완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