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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글루 Jun 02. 2023

낡고 지친 레즈비언의 이쪽 어플사용기(4)

몸과 마음이 아프면 병원에 갑시다.



- 매칭되었습니다!




 매칭되었다는 말은 왜 이렇게 쓸데없이 경쾌하게 뜨는 걸까? 봐도 봐도 적응되지 않는 화면을 멀뚱히 본다.

 프리미엄의 베네핏은 제법 달콤했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 중에 고를 수가 있다. 이런 분들이 나를 좋아하는군! 나를 좋아한 사람 목록만 봐도 기분이 좋아지고, 여유가 생겼다. 역시 돈이 좋구나.. 무엇보다도 가장 좋은 점은, 평소라면 매칭되지 않았을 사람들과도 매칭되어 대화할 수 있다는 것.


 물론 프리미엄 결제를 했더라도, 상대와 대화를 이어나가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껍데기만 훑는 대화가 반복되면서 사실 모두 다 같은 사람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까지 들었다. 어플을 삭제하고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프리미엄을 결제해 두니 삭제를 실행에 옮기는 것이 쉽지 않았다. 역시 의지는 돈으로 사는 것. 울며 겨자 먹기로 어플을 열심히 했다.


 대화만 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아프다는 사람도 있었다. 의사가 된 것처럼 '오늘은 어디가 불편하세요?'하고 물으면 때마다 다른 답변이 나오는 것이 나름 재미있어서(나도 참 나다.) 일주일 정도는 연락을 해봤는데 정말 매일 새로운 아픈 곳을 이야기하셨다. 이것도 나름의 창의력이 필요한 일이 아닌가? 다른 이야기를 하는가 싶어도 신기할 정도로 금방 아픈 이야기로 돌아섰다. 연어는 북태평양을 건너 알래스카를 지나 다시 우리나라로 오기까지 2만 km정도가 된다는데, 굳이 그 거리를 회귀한단다. 회귀 본능이 거의 연어와 맞먹는 이야기를 일주일째 듣고 있자니 나까지 위가 쓰리고 무릎이 쑤셨다. 언제까지고 이럴 수는 없겠다 싶어 건강히 잘 지내시라 하고 작별을 고했다. 아프지 마세요 연어님.

마음이 아픈 사람도 있었다. 주 7일 내내 쉽게 잠들지 못하면서도, 사는 것이 힘들고 괴롭다 말하면서도. 정신과나 상담센터를 기피하는 사람. 나 역시 상담을 꾸준히 다니고 있던 중이라, 어쩐지 안타까웠다. 마음이 아프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부터 쉽지만은 않겠지만, 아프면 병원에 가는 것이 맞을 텐데요..


 몇 명의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더 뚜렷해지는 마음. 그래, 적어도 사람이 자기 몸과 마음은 가눌 수 있어야지. 잘 안되더라도, 적어도 어떻게든 해보려고는 해야지. 누군가를 내가 구해낼 수도 있을 거라는 오만함은 버렸다. 구원은 셀프다.


 근데, 같은 말이기는 하지만 프로필에 쉽게들 적어두시는 '내/외적으로 괜찮으신 분'이라는 말은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는다. 쉽지 않네.





 이번에 매칭된 S는 거리부터가 꽤 멀었다. 프로필의 소개 글이 성의 있는 형태도 아니었고, 마스크를 쓴 사진 속 인상도 어쩐지 조금 사나워 보이고, 키도 엄청 클 것 같고, 어쩐지 딱딱한 사람일 것 같아 이래저래 내 스타일은 아니겠다, 싶었다. 평소라면 좋아요 쪽으로 스와이핑 하지 않았을 텐데 묘하게 궁금했다.


 S는 우리의 거리가 가깝다며, 반갑다 말했다. 가깝지 않은 것 같은데, 30km 정도 차이가 나는데요..? 다시 보니 거리가 늘어났다고 말하던 S. 처음부터 어쩐지 삐그덕 거리는 대화. 말투도 어쩐지 좀 딱딱했다. 우리는 밋밋한 듯, 건조한 대화를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대화가 꽤 재미있는 모양새로 이어졌다. S는 운동을 꾸준히 하고, 부지런하게 지내는 사람이었다. 즐겁게 살아가려 하는 부분이 좋았다. 주말에는 보통 뭐 하며 시간을 보내냐 묻길래 최근에는 취미로 미술학원을 다니고 있다고 했다. 미술학원에서 인생을 배우고 있다고 하니 신기해하며, 본인도 전에 잠시 다녔었다고. 연필 깎는 게 제일 재밌었단다.

 일단, 몸과 마음이 아프지 않은 사람이라는 점부터 반가웠다. 이런저런 대화를 이어가다가 끝내는 서로가 키우는 몬스테라를 찍어서 신나게 자랑하기까지 이르게 되었다. 음. 나의   되는 인생이론  하나에 따르면, 그는 좋은 사람일 것이다.


[식물을 사랑하는 사람 중 나쁜 사람은 드물다.]


  시간이 지났을까? 어플에서 대화를 하다가 손목이 아프다며   만나서 이야기해 보자는 귀여운 핑계를 대길래 만나보기로 했다. 당장 다음날 보는 것이라  걱정이기는 했으나, 대화한  10 만에 만난 사람도 있었으니 다음날 만나는 정도는 마음먹을만했다. 떨리는 것은 어쩔  없지. 당연한 일이니 부딪혀보자!


 다음날 퇴근 , S 나의 중간 지점인 모르는 동네로 갔다. 처음 가보는 장소와 처음 만나게  사람. 1월의 오싹한 날씨와 더불어 긴장감이 주변 공기를  얼어붙게 들었다.  사람을 어떻게 알아보지? 뭐라고 인사하지?  안이 바싹바싹 말랐다. 약속 당일에 펑크내거나, 도망가는 사람도 있다던데. 바람맞으면 어떡하지? 지하철 역에서 걸어 나올  알고, 그쪽만 쳐다보고 있었는데


늦어서 미안하다고 말하며 S가 옆에서 불쑥 나타났다. 아이 깜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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