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저는 이제 어플을 삭제합니다.
"안녕하세요. 오래 기다리셨죠. 미안해요."
지하철 출구가 아닌 다른 곳에서 툭 튀어나온 S. 어떻게 그쪽에서 오세요? 질문을 삼킨 채로 저녁을 먹으러 나란히 걸어갔다. 어색하지만 별생각 없이 이어지는 스몰토크. 서로의 집이 멀어 중간 지점에 위치한, 처음 들어본 역에서 만난 터라 휑한 동네를 황망한 눈으로 괜히 한 번 둘러보며 이 동네는 정말 뭐가 없네요. 대충 그런 식의 말들을 했다. 그러게요. 비슷한 류의 답변을 듣는다. 이렇게 또 한 명의 좋은 친구가 생기는 것일까?
미리 가기로 정해두었던 식당에 들어가 음식을 주문하고, 식사를 기다리는 동안 몇 마디를 나눴다. 마스크 벗는 순간은 왜 이렇게 떨리는지 몰라. 코로나 시대가 내게 남긴 교훈을 떠올리며, [상대가 마스크 속 내 얼굴을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구성해 놓기 전에, 예상할 시간 없이(?) 최대한 빠르게 벗자.] 후다닥 마스크 벗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는 음식이 나오고 나서야 마스크를 벗었던가? 아무튼 나보다는 조금 늦게 마스크를 벗었던 것 같다.
생각 없이 앞을 봤는데 툭-하고 심장이 떨어져 버렸다. 어떻게 그렇게 웃으세요? 질문을 또 삼키고 재빨리 눈을 깜빡였다. 마음이 들키지 않게 입꼬리를 억지로 내렸으나 엎어진 심장은 쉽게 추슬러지지 않았다. 아니, 사람 웃는 모습이 이럴 수가 있나? 세상에.
첫눈에 반한다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10대도 아니고, 10년 가까운 장기 연애가 끝났기도 했고, 이제 누군가를 만나려면 좀 신중히 생각하고 싶었는데.. 이것저것 재고 따져도 모자랄 시기에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대화를 하다 보니 무서울 정도로 나에 대해서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어플에서 어제 이야기 나눌 때 레즈비언 뉴스레터를 발행한다고 했는데, 밤 사이 약 2년간 40회 차 넘게 발행해 온 뉴스레터를 다 읽고 왔다는 것이다. 이것은 대체 무슨 관심이며, 무슨 정성인가? 이 사람을 어떡하면 좋을까. 그의 웃는 얼굴이, 웃음소리가 너무 좋아서 뚝딱거리며 계속 광대 짓을 했다.
이렇게 광대같이 굴기만 해서는 연인으로 발전하기에 무리가 있지 않을까? 사람을 꼬시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 내가 해낼 수 있을까? 아마 난 안되지 않을까? 오랜 연애가 끝난 뒤 남은 것은 바닥난 자존감의 잔고를 시시때때로 확인하는 습관.
버섯 샤브샤브를 어찌어찌 먹기는 했는데, 어디로 어떻게 먹었는지 맛도 기억나지 않는다. S는 제대로 먹지 않는 나를 쓱 쳐다보았다. "안 먹으면 이따가 후회할 텐데요." 버섯인지 밥인지 뭔가를 숟가락으로 살뜰히 그러모으며 시선을 내린다. 이런 모습까지 매력적이면 어떡해. 큰일이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답을 찾지 못하고 애꿎은 입술만 핥아보았다. 저기. 그쪽은 모르시겠지만, 지금 저한테는 밥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요.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근처의 시끄러운 호프집에서 맥주 한 잔씩을 마셨다. 중간중간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 서로에게 몸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나눴다.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를 밤이었다.
아니, 이 사람 놓치면 안 될 것 같은데 어떡하지? 고민하면서도 광대 짓은 좀처럼 멈춰지지 않았고, 올라간 광대도 좀처럼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 S님만 괜찮다면, 또 만나고 싶어요.
집에 가서도 계속 생각이 났다. 다음 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말고 다음에 또 만나고 싶다고 먼저 연락했다. 대화는 잘 이어졌고, 우리는 매일같이 연락을 주고받았다.
3번째 데이트날, 거리를 걷다가 불쑥 말했다. "처음 본 날 웃는 얼굴이 너무 예뻐서 계속 웃기고만 왔다고 동생에게 말했어요." 망원시장 골목길 인파 속에서 당신의 뒷모습이 발그스름하게 물드는 것을 보았다.
그날 데이트가 끝날 때쯤이었나, 어두운 바에서 뭣도 모르고 시킨 위스키의 강렬함에 정신을 못 차리던 중 S가 입을 열었다.
"저는 어플 지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