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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글루 Mar 29. 2023

우리의 연애는 한 번씩 절름거렸다.

퀴어에세이 시작합니다.



여기저기 꽃 소식이 들린다. '아, 봄이구나.'



 대개 사람들은 힘든 시기를 ‘겨울’이라는 계절에 빗대곤 한다. 칼바람이 얼굴을 에이는 추위. 몸과 마음을 동그랗게, 웅크려야만 하는 차갑고 쌀쌀한 계절, 겨울. 이 계절만 잘 견디면 ‘봄’이 올 것이라고. 만물이 소생하는 생명의 계절이 온다고. 시간은 결국 지난다고.

누군가를 위로할 때, 우리는 그렇게 종종 봄을 데려와 희망을 말한다. 힘들고 괴로운 일을 겪은 사람에게는 응당 행복이 뒤따를 것처럼. 그것이 필수불가결한 무슨 법칙이라도 되는 것 마냥.





 한 사람과 꽤 오랜 시간을 함께 했다. 인생의 3분의 1을 함께 보냈으니, 제2의 가족이기도 했다. 헤어진 연유야 어찌 되었든, 나를 조금이라도 사랑한 주변 친구들은 오래된 연인과 헤어진 내게 위로를 건네며 곧 따뜻한 봄이 올 거라 했다.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되고, 좋은 일이 있을 거라고. 어쩜 그렇게 약속이라도 한 듯이 말을 맞추어서 이야기를 할까? 여러 번 이야기를 들으니 특별한 주문 같기도 했다. 이 마법의 주문이 통해 어쩌면 정말로 봄이 올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스스로를 세뇌시켰다.


“응. 고마워.”


 그럼에도 불구하고 봄이 올 거라는 위로의 말은 지금 내 계절이 겨울이라는 것을 한 번 더 상기했고, 위로를 들을 때마다 꽤 아팠다. 위로를 건네는 친구가 겪고 있을 계절은 어떤 계절일까? 나의 겨울을 그와 비교하며 괜히 친구를 미워하기도 했다. 알고 있다. 분명 내가 저 사람의 입장이 된다면 똑같이 ‘봄이 올 테니 기운 내라’고 했을 것이다. 이 말 밖에는 할 수가 없을 거야.


 눈앞에서 요동 치는 눈보라를 억지로 못 본 척하며, 고맙다는 말을 뱃속 깊숙한 곳에서 꾸역꾸역 길어 올린다. 울컥울컥, 수시로 피를 쏟아내는 심장의 펌프질과 리듬을 맞추면서.






 전여자친구는 때때로 작별인사처럼 ‘너는 더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을 거야.’라며, 내가 만날 다음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는 했다. 그만하라고 표정을 굳혀도 좀처럼 말을 멈추지 않던 그 애. 그런 말 하지 말라고. 왜 헤어질 생각을 하냐고. 같이 잘 지내면 되지 않냐고. 우리가 같이 봄을 맞이하면 되지 않냐고 말하자 그 애는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왜 우리에게는 겨울만 있었던 것일까? ‘사랑’이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 호흡기를 달고 목숨을 연명하던 우리의 연애.



 왼발과 오른발의 하중이 달라서 우리의 연애는 한 번씩 절름거렸다. 왼발이 아프면 오른발이 더 지친 채로 집에 돌아왔다. 냉찜질을 해야 할지 온찜질을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로 내일이면 괜찮아질 거라 믿으면서 욱신거리는 두 다리를 서로 주물러주고는 했다. 당신은 어땠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나는 어제보다는 오늘이 더 나아졌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우리의 연애가, 당신의 우울함이, 나의 불안이 나아지고 있다고 믿으며. 계속해서 걸어야 되는 우리 앞에 놓인 길들을 떠올리며 잠에 들고는 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는 잠드는 게 두려웠다. 다음 날에도 더 나아지지 않으면 어떡하지? 오늘보다 더 아픈 날이 계속되면 우리가 버틸 수 있을까?



 언젠가 당신은 살아있다는 것이 저주 같다고 했지. 맞아. 태어나 빨간 탯줄이 잘리는 순간부터는 모두가 멈추지 못하고 빙글빙글 돌며 '삶'이라는 이름의 춤을 춰야 해. 나를 구하러 온 백마 탄 누군가의 키스로도 끝나지 않는 저주. 구한답시고 달려온 그에게도 그 만의 저주가 걸려있을 테니까. 우리는 각자 처절하고, 철저하게 자기 몫의 저주를 버티며 춤을 이어가야만 해. 걷거나, 뛰거나, 몸을 부딪혀가면서. 솔로 파트로 좌중을 압도하거나, 단둘이 붙어 열정적으로 숨을 나누거나, 여럿이 무리 지어 오차 없는 군무를 추면서.


 그저 몸을 떨고 있어도 좋으니 어떤 식으로든 움직여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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