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옹 한 꼬집
물은 ‘대충’ 일주일에 두어 번 정도 주면 된다, 혹은 15일에 한 번 정도 듬뿍 주면 된다는 식물 가게 사장님들의 말을 그대로 믿는 사람이 아직도 있을까? 집으로 돌아와 그들 말 대로 물을 주면 식물은 그대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는 했다. 이 정도면 고이 보내 드리기 위해 우리 집에 데려오는 것이 아닐까? 대체로 그들 죽음의 사유는 ‘익사’였다.
이 손으로 또 식물을 죽였다는 죄책감. 만신창이에 피투성이, 아니 죽은 식물을 거둬 흙투성이가 된 손을 바라본다. 한동안 그렇게 텅 빈 화분을 슬픈 마음으로 쳐다보고 반성하다가, 지나는 길에 보이는 싱싱한 식물을 보고 사랑에 빠져 그를 집으로 들이고, 또 후회하는 얼빠진 사랑의 반복.
그러고 보니 음식 간을 어떻게 맞추냐는 말에 ‘적당히’ 소금 간하면 된다는 말도 참 책임감 없지 않나? ‘한 꼬집’이라는 말도 싫다. 얼마나 꼬집는지 사람마다 다르잖아. 제가 얼마나 꼬집을지 알고 계세요? 살면서 ‘대충’이나 ‘적당히’라는 말 안에 숨겨진 포인트를 찾는 것이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꽃집에서 일 년가량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을 때, 일을 하면서 화분의 물주기를 쉽게 알아볼 수 있는 '화분 습도계'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에 입을 틀어막았다. ‘세상에, 이런 좋은 것도 있구나!’
꽃집에서 일하면서 이 식물은 어떤 특성이 있는지, 어떤 흙을 좋아하는지, 어떤 빛에서 잘 자라는지, 바람을 좋아하는지 등을 공부했다. 사랑은 어느 정도 공부가 필요한 것이었다. 어느새 제법 많은 것을 익혀 손님들에게 물주기를 코치하는 경지에 오르게 되었다.
“열흘에 한 번 정도라고 생각하면 좋기는 한데, 집마다 환경이 다르니까요. 거기에 따라 물주기는 또 천차만별이에요. 물을 줄 때 됐다 싶을 때 나무젓가락을 흙에 꽂아보세요. 나무젓가락이 젖어 있으면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겁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에 나무젓가락을 꽂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냥 안아주면 안 돼?”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고르다가 끝내 이상한 말을 지껄이던 나를 멈추게 했던 당신의 한 마디. 결국 울음이 터져버린 당신과 그 앞에 서서 당신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보는 나. 어떻게 해야 이 마음이 전해질지 몰라 그저 온 힘을 다해 당신을 안아볼 뿐이었다.
“…. 숨 막혀.”
“아, 미안.”
뒤로 서둘러 물러났다. 도대체 적당한 위로는 어떻게 하는 것일까? 서투른 위로에 오히려 상처가 나지는 않았을까?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걱정스레 들여다보았다. 당신이 ‘익사’ 하지 않아야 할 텐데. 이번에는 조심스럽게 당신을 안으며 가만히 가늠해 보는 것이다. 이 정도가 ‘한 꼬집’이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