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성수역 플랫폼

by 최종신

사고 이후 미영의 말수는 거의 줄어들었다.

끔찍한 기억은 쉽게 잊히지 않을 것 같았지만, 1년이 지나고 기억 속에서 조금씩 밀어내려는 노력이 더해져서인지 미영은 이제는 견딜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 밖으로 나가기도 좀처럼 쉽지 않았던 미영이 생각한 것은 멀리 있는 곳으로 매일 외출할 일을 만드는 것이었다.

'무슨 일로 매일 외출할 일을 만들까?'

사실 사고가 나기 전 미영은 아주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과에서도 친구들과 제법 잘 어울렸었고 간간이 아르바이트를 하긴 했지만, 각박한 대학생활을 보내지 않아도 될 만큼 여유도 있는 편이었다.

신입생이면 누구나 꿈꿔 볼만한 미팅도 몇 번 나갔었지만 그다지 마음에 맞는 상대를 만나지는 못해서 아직 남자 친구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큰 불만은 없었다.

그저 과 친구들과 나누는 수다만으로도 강의 사이의 시간을 유쾌하게 보냈었고, 학교 축제도 즐기면서 1학년의 자유를 만끽하기도 했다.

그러던 미영이 사고를 겪고 학교에 휴학하게 되면서 그녀의 평범한 일상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강 저편의 아련한 풍경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처음 3개월 동안은 수많은 악몽에 시달리며 제대로 잠을 못 자기도 했지만, 차츰 그녀가 겪었던 사건이 마치 소설이나 드라마 속에서 본 장면인 것처럼 여겨지기 시작했다.

잠자는 시간도 조금씩 길어지고, 자신에게 스스로 위로를 하면서 편해지려는 노력도 하게 되었다.

미영이 강남역 부근 학원가의 광고 전단을 본 것은 우연이었지만, 뭔가 끌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 더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려면 다른 사람들과 비슷한 일상으로 외출할 일을 만드는 게 좋겠어.'

또래 친구들이 1학년이 지나고 나면 환각에서 깨듯이 졸업 후 취업을 걱정하기 시작하면서 다니는 어학학원이 떠올랐다.

3개월 일본어 초급 회화반의 수강 신청을 하고 온 미영은 매일 평범한 일상으로 들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며 아주 오랜만에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었다.

성수역은 대학 입학 후 그녀의 학교 근처에서 얻은 자취방에서 가까운 역이자, 그녀가 지난 1년간 거의 집에만 있으면서 창밖으로 멀리 바라보던 역이기도 했다.

언젠가 다시 저 역에서 출발하는 2호선 전철을 타고 평범한 대학생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조금 우울하게 바라보던 바로 그 역이었다.

학원은 1시부터 시작하는 오후 시간대로 골랐다.

아침을 느긋하게 시작하고 집을 나서서 한 끼의 식사를 밖에서 하고 수업을 마치면 적당한 오후 시간이 되었으면 했기 때문이다.

외출해서 시간을 보내는 방법에 익숙해지면 올가을부터는 다시 학교에 복학할 수 있다는 희망도 품어보았다.


미영은 오랜만에 나서는 외출 길에서 마주치는 모든 풍경을 소중하게 눈에 담으려고 했다.

봄이 오는 것을 시샘하듯 아직은 냉랭한 공기 속에서도 조금씩 꽃을 틔우려고 준비하는 가로수들과 조간신문들이 차곡차곡 걸려있는 잡화점을 다시 보는 것도 반가웠다.

바쁜 출근 시간이 지난 연세 있으신 분들이 더 많은 지하철 역사의 모습이며, 먼지를 뒤집어쓴 유리창 너머로 고만고만한 건물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역 부근의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학원에 다닌 지 2주째가 되던 날, 반복되는 풍경 속에 어떤 사람이 자꾸 눈에 띄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아마 예전 같으면 지나는 길에서 같은 사람을 반복해서 만나게 되더라도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 모르고 지냈을 것이다.

하지만 1년여 만에 다시 외출을 시작하면서 반복적인 일상 속 세상을 세세하게 바라보게 되어서일까?

풍경 속에 같은 사람이 자주 눈에 띄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 것이다.

'저 사람 오늘도 같이 탔네.'

늘 오르는 계단을 지나 개찰구를 통과해서 열차가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마주치는 남자와 같은 열차에 타기를 여러 번..

미영은 마치 작은 게임을 하는 것처럼. 다음 날에도 이런 반복적인 우연이 다시 되기를 기대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미영과 함께 타고 내리는 역까지도 같다는 우연치고는 조금 놀라운 우연이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면서 미영은 그 남자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것을 보게 되었다.

스스로 힘을 내자고 다짐을 해도 얼마 전까지 거울을 바라보면 늘 마주쳤던 그림자 가득한 그녀의 얼굴.

'저 남자도 꽤 힘들어 보이네...'

미영의 학원은 강남역에서도 학원이 몰려있는 이면 도로 건물에 있다.

학원에 가기 전 그녀의 선택을 기다리는 것은 오늘 뭘 먹을까 하는 스스로에 대한 질문의 답이었다.

한눈에 띄는 곳만 수십 개가 넘을만한 음식점들 즐비한 거리에서, 점심 먹을 식당을 고르는 일은 미영에게 스스로 세상 속에 무사히 안착했다는 안도감을 주기도 했다.


그날도 미영은 안가밨던 곳에서 혼자 먹는 점심 식사를 하려는 생각으로 간판들 사이에 이리저리 시선을 옮기고 있었다.

그런 미영에게 한 건물 2층 식당의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은 우동과 일본식 돈가스, 그리고 메밀 소바 같은 꽤 잡다한 음식을 파는 그런 식당이었다.

계단을 올라 음식점 문을 열고 들어가던 미영은 꽤 놀라고 말았다.

'그 남자네!'

미영이 찾은 그 식당에서 테이블 사이를 누비며 서빙을 하고 있는 사람은 지난 몇 달 동안 늘 같은 전철에서 마주쳤던 바로 그 남자였다.

미영은 다음 날부터 식당 고르는 일을 그만두고 점심마다 그 남자가 일하고 있는 그 식당을 찾게 되었다.

반복되는 우연이 특별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왠지 자기를 못 알아보는 사람의 일상을 바로 곁에서 엿보는 것 같은 묘한 쾌감이 느껴지기도 했기 때문이다.

우연히 마무치는 지하철에서는 늘 근심에 차 있던 남자가, 서빙을 하면서는 간간이라도 웃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미영의 마음이 조금은 편해지는 것도 좋았다.

미영에게 그렇게 일상으로의 복귀에 즐거움이 더해진 지도 거의 석 달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학원에서의 일본어 수업도 꽤 진척이 있어서 이제는 누구의 도움 없이도 일본의 어느 마을에서 혼자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도 생겼다.

물론 가을에 다시 학교에 돌아가서 평범한 대학생활을 하는 것도 끄떡없을 거라는 믿음도 더해졌다.

그래서 지난 수개월간의 학원 수업 마지막 날인 오늘 그녀는 조금 더 용기를 내려고 했는지 모른다.

지난 석 달 동안 다시 평범한 일상 속으로 돌아가려는 노력의 과정에 늘 함께였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같은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왔던 그 남자에게 적어도 말이라도 한번 걸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가 어떻게 받아들이던, 그녀가 기분 좋게 일상으로 돌아가려는 노력의 말미를 장식하는 이벤트라는 생각도 해 봤다.


"저 혹시 2호선 성수역에서 11시쯤 지하철 타고 오시지 않으세요?"

몇 번의 주저함 뒤에 다시 그녀의 테이블 쪽으로 오는 그에게 미영은 용기를 내서 말을 건넸다.

사실 그 뒤로 나눈 대화는 별로 생각이 나지 않았다.

눈앞이 온통 하얗게 보일 정도로 먼저 말을 건 용기는 어디로 갔는지 그녀의 심장은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밥은 어떻게 먹었는지도 모르게 정신없이 계산하고 식당을 나온 미영.

거리에 무심하게 오고 가는 사람들이 이상하리만큼 그녀에게 그 얼마 안 되는 시간은 길게, 아주 길게 느껴졌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뜬 미영은 전날 음식점에서 그 남자에게 말을 건 자기의 모습이 꿈이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꿈은 아니었고, 다시 떠올리니 얼굴이 다 화끈해지는 것을 느꼈다.

'내가 무슨 일을 한 거지?'

하지만 왠지 아직 해보지는 않았지만, TV에서 본 번지점프라도 한 듯한 생각이 들었다.

살짝 스스로 대견하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래 그 정도면 일상으로 돌아간 기념 이벤트로 충분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인천공항 출국장은 비수기여서인지 그다지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일찌감치 체크인하고 홀가분하게 면세점들이 즐비한 곳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비행기가 출발하는 시간 동안 누릴 여유가 더 느긋하게 느껴졌다.

미영은 다시 오랜만에 연락을 끊었던 대학교 친구들과 통화를 하면서 그간 그녀가 겪었던 일을 더 수다스럽게 털어놓았었다.

모두 그녀가 먼저 전화 오기를 기다렸던 터라, 너무 반갑게 그녀를 맞아주었다.

특히 친하게 지냈던 그녀의 과 친구들이 이구동성으로 여행을 권했던 것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미영도 조금은 흥미가 있었던 터라 일본 여행을 자연스레 계획하게 되었다.


비행기 창밖으로 직각으로 만든 간사이 공항이 있는 인공 섬 위의 활주로가 선명하게 눈에 띌 무렵, 미영은 여행을 떠나온 설렘을 실감하게 되었다.

'그래 이번 여행까지 잘 마치면 이제는 더는 아파하지 않기다.'

스스로 객관화시켜서 말을 거는 미영의 발걸음이 매우 가볍다.

공항에서 하루카 특급열차를 타고 한 시간여를 지나서 도착한 교토역에 내리니, 건물 사이로 가까이 보이는 교토타워가 미영의 눈에 띈다.

늘 책이나 TV에서만 보던 교토타워가 눈앞에 보이자 약간은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연예인을 눈앞에서 마주치듯, 교토타워는 그녀가 지난 3개월 동안 배웠던 일본어 교본 속에서나 있어야 할 것 같은 건물이었는데 이제 바로 지척에서 바라보고 있다.

'그래 내가 여기까지 오게 됬구나.'

짧은 순간이었지만 평범한 신입생으로부터 사고를 당하고 1년 동안 거의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하던 시간들과 지난 몇 개월의 가슴 뛰던 그 남자, 그리고 학원 생활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교토를 택한 것은 관광지로서 미영 또래에는 적당한 희소성도 있어서였지만 무엇보다 일본어 강사의 추천에 고르게 된 것이 더 큰 이유였다.

"일본을 알려면, 과거의 긴 시간의 역사가 박제되어 잘 보존되어있는 교토를 가 보세요."

미영에게는 지난 시간 중 일부는 도려내어 소멸시키고 싶은 생각이 들었는데, 역설적으로 긴 역사가 박제되어 있다는 말에 호기심이 생겼다.

교토에는 잊고 싶은 역사까지도 확인할 수 있는 잔재가 남아 있을까 궁금해졌다. 남기고 싶은 역사만 보존했겠지라는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편하게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고 살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그러기 위해 불면의 밤을 보냈던 지난해 일들이 다시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래도 단 몇 마디 말만 건넨 게 전부이긴 하지만 그 남자 때문에 뭔가 추억거리가 될 만한 용기를 내게 되었다는 뿌듯함에 미영은 스스로 흐뭇해졌다.

교토역에서 거리로 나서는 미영의 발걸음이 매우 경쾌하게 보였다.


*작가's talk;
첫 만남의 순간이 가장 강렬한 기억으로 남는 것 같습니다.
그 장소와 나눈 대화들, 온도와 습도 그리고 냄새와 분위기 까지도..
아마 그 좋은 기억은 온몸 깊숙한 세포들에게도 좋은 영향을 끼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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