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강남역 3번 출구

by 최종신

영찬은 바빴던 하루를 언제나 강남역 3번 입구에서 마무리하곤 한다.


늦은 저녁 3번 입구의 첫 계단으로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 고단한 하루가 끝나고 집으로 향하는 느긋한 여정에 오른다는 생각을 한다.
휴학생이자 늦은 복학을 걱정해야 하는 가난한 대학생 영찬에게는 지하철에 몸을 의지하는 시간부터 낮 동안의 긴장에서 벗어나 휴식의 시간이 시작된다는 생각에 마음을 놓게 된다.


올 초만 해도 전역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군인의 신분이었지만, 정작 제대를 하고나자 주체할 수 없는 시간속에서도 마음은 편하지 못했다.

시간을 분 단위로 쪼개서 내몰아치던 군대와 달리, 걱정은 쌓이지만 주체할 수 없는 시간 또한 온전히 영찬 본인의 몫이었다.

이미 학자금 대출을 당겨 쓴 터라, 복학하자마자 여유 없는 집안 환경에 당장 등록금 걱정부터 해야 할 상황이었다.
때문에 영찬이 급히 알아본 것 아르바이트 자리가 지금 일하는 음식점의 홀 담당 서빙 자리.
강남역 3번 출입구는 그때부터 영찬에게 일과 휴식 사이를 건너는 경계가 되었다.

매일 일정하게 늦은 아침 출근을 하고, 자정 무렵 집으로 향하는 아르바이트는 얼마 전 제대한 영찬에게는 더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규칙적인 생활이 가능할 것 같았고, 느슨해졌던 시간도 이제는 바짝 쪼여서 제 자리를 찾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하루 9시간이 넘는 아르바이트로 복학 전에 어느 정도 돈도 모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이 여기! 메뉴판 좀."
"저희 포크 좀 다시 가져다주세요."
"화장실이 어디예요?"
"샐러드 소스가 좀 시지 않아요?"
"아까 물 달라고 했는데 안 줘요?"

하루 종일 영찬을 찾는 손님들에게 이리저리 불려 다니다 보면 아르바이트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게 하루는 짧기만 했다.

이제는 아주 오래전부터 서빙을 해 왔었던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영찬은 지금의 일이 점점 더 익숙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거의 매일 혼자 와서 늦은 점심을 시키는 비슷한 또래의 여자 손님이 건넨 말 한마디로 영찬의 단순했던 일과가 다른 의미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저 혹시 2호선 성수역에서 11시쯤 지하철 타고 오시지 않으세요?"

영찬을 바라보며 웃음을 지어 보이는 그 여자 손님이 건넨 말에 영찬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네? 저요? 아 그러네요. 11시..... 성수역.... 그런데 왜요?"

영찬의 뚱한 표정을 보고 한층 더 미소를 지으며 그 여자 손님은 말했다.

"혹시 저 혹시 보신 적 없으셨어요? 저도 매일 그 정도에 성수역에서 지하철을 타거든요."

'뭐지 이 여자?' 영찬은 그런 생각을 하며 여느 손님에게 대하듯 사무적인 답변을 이어갔다.

"아 그래요? 반갑네요."

영찬은 대답하면서도 낯선 여자 손님의 질문이 조금은 부담스럽다는 생각이 들어 적당히 이 대화를 마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는 더 말이 없는 여자 손님.

영찬도 조금 시간을 끌다가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 막 다른 손님이 떠난 테이블로 자리를 옮겨 남긴 음식과 그릇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날은 그 이상 기억할 만한 대화가 없었지만, 그 날 나눴던 짧은 대화를 자주 떠올리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영찬은 알지 못했다.

다음 날 오전 11시경, 성수역의 지상 플랫폼에서 이미 환한 햇살을 받으며 기차를 기다리던 영찬은 전날 나눴던 여자 손님과의 대화가 문득 떠올랐다.
그리곤 주변을 두리번두리번 거려 봤지만, 어제의 그 여자 손님을 찾을 수는 없었다.

'오늘은 아닌가 보네. 도대체 얼마나 자주 봤다는 거야? 싱겁기는'
이런 생각이 들자 공연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던 자신이 멋쩍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한번 궁금해지면 자꾸 생각이 나기 마련인 것인가?
식당에 와서 옷을 갈아입고 주방과 테이블 사이를 누빌 때에도, 영찬의 시선은 자꾸 입구를 향하게 되었다.

그녀가 건넨 몇 마디 안 되는 말과 미소가 오후 내내 자꾸 머리에 떠 올랐다.

어느덧 시간이 지나고 퇴근할 때 까지도 괜한 기대에 입구에 들어서는 손님들마다 쳐다보곤 했던 영찬은 조금은 서운한 마음도 들었다.

'어제 무안을 줘서 안 오나?'
'아 이름이라도 물어볼 걸...'
'내 또래의 여자가 그 정도 용기를 내서 먼저 말을 걸었으면, 내가 더 친절했었어야 했는데...'

아쉬운 마음이 쉽게 가시지 않고 마음 한구석에 찜찜한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영찬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다시 그녀를 만날 수 있기만 기다려 보는 것뿐...
그렇게 그 날 하루는 지나갔다.

영찬이 다시 그녀를 만난 것은 그 뒤로 보름 정도가 지나서였다.
잠깐 동안이나마 아쉬웠던 마음조차 잊고 그날도 무심하게 지하철에 오르려던 때였다.

"잘 지내셨어요? 또 보네요."

막 문이 닫히고 출발하는 객차 안에서 뒤를 돌아보니, 같은 출입구로 따라 탄 듯 말을 건네는 그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 안녕하세요! 오래간만이네요."
"저도요. 그런데 이번엔 얼굴 알아보시네요?"

왜 못 알아보겠는가?
처음 그녀가 식당에서 말을 건네 온 지 한 열흘까지는 그녀의 얼굴이 또렷하게 생각이 나기도 했었다.
물론 점점 흐릿해지기는 했지만 다시 그녀의 얼굴을 본 순간 바로 알아볼 수밖에..

"아 얼굴, 기억하죠 그럼. 저희 식당 손님이시기도 하고.."
대답을 해 놓고 영찬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손님이라서 기억한다고 대답하다니.'

"아 그렇죠, 꽤 단골이긴 하죠 제가, 하히하"
이 여자 또 웃는다.

다시 만나면 해야지 하고 생각했던 질문을 풀어놓은 영찬.

"근데 이 시간에 어딜 자주 가시나 봐요?"
영찬이 바로 이어 미리 만나면 해야지 하고 준비했던 질문을 던진다.

"저 그 근처에서 학원에 다니거든요. 그래서 점심 먹으러 영찬 씨 일하는 곳에 갔던 거고요. 저 참 자주 갔었는데 지난번까지는 몰라 보셨던 거고요…. ㅎㅎ"
"아 그럼 제가 더 죄송하네요.ㅎㅎㅎ"

왠지 자연스럽게 대화가 오가는 것 같아 영찬은 기분이 좋아졌다.
내친김에 다시 만나면 묻고 싶었던 질문을 이어가는 영찬.

"저 실례가 안된다면 혹시 성함 여쭤봐도 돼요? 전 박영찬입니다."
"아, 영찬 씨구나.. 저는 이미영이요. ㅎㅎ"

자기 이름을 말하며 밝게 웃는 미영의 대답에, 영찬은 의식하지 않았는데도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지하철은 어느덧 한강을 건너고 있었다.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강물이 오늘따라 더 화사하게 보이는 것만 같았다.

미영은 몇 번 안 만난 사람 치고는 너무 친근하고 편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더 나누고는 영찬이 미영에게 물었다.
" 그런데 성수역 근처에 사시나 봐요?"

성수역.

사실 영찬도 성수역은 낯선 곳이었다.
제대 후 같은 동아리였던 친구 집에서 신세를 지면서 먼저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아봤었고, 일자리가 강남역 부근으로 정해진 뒤에서야 출퇴근할 수 있는 싼 월세방을 알아봤었다.

그래서 알아본 곳이 지하철 2호선으로 강남역에 이어지면서도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성수역 부근의 연립 반지하 방을 찾게 되었다.
학교야 조금 멀어도 우선은 아르바이트를 본격적으로 해야 하는 영찬에게는 적당한 위치와 가격의 방이었다.

미영은 영찬의 질문에 역시 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뇨, 집은 조금 떨어진 곳에 있어요. 그냥 지하철을 여기서 타죠. ㅎㅎ"

지하철은 잠실 종합운동장역을 막 지나고 있다. 영찬은 우연히 창밖을 보다가 대화를 이어나갈 실마리를 발견하고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미영 씨 혹시 야구는 좋아하세요?"
"아.. 야구요?"
"네 혹시 여기 잠실야구장은 와 보셨나 해서."
"아뇨, 한 번도 안 가봤네요. TV에서 아주 잠깐씩 야구를 보기는 했어도. 응원하는 관중들 신나 보여서 한번 직접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었어요."

영찬은 다시 만날 구실을 찾았다는 생각에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말했다.
"그럼 미영 씨 저랑 야구 한번 보러 가실래요?"

영찬은 자신의 입 밖을 떠난 질문에 대한 미영의 담을 기다리는 그 짧은 순간이, 마치 아주 멀리 날아가서 돌아오지 않는 부메랑을 기다리는 시간처럼 길게만 느껴졌다.

'2번째, 그것도 우연히 만나서 벌써 야구를 같이 보자고 하다니.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가슴이 쿵쾅거리면서 진정이 안 됐다.
그저 미영의 입만 쳐다보고 있는데, 드디어 입을 열었다.

"저도 그러고 싶기는 한데…. 나중에 대답해야 할 것 같아요. 하하하"

미영의 말이 거절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해서 아리송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같이 가자는 영찬의 청을 뿌리친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리고 계속 얼굴을 마주하기가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정작 미영의 얼굴은 별다른 동요 없이 방긋 웃기만 하고 있어 영찬의 머릿속은 더 하얘졌다.

두 사람 사이의 어색한 공기를 깨듯이 다음 역이 강남역이라는 안내 멘트가 들려왔다.
방송을 들은 두 사람이 입구를 향해 몸을 돌려 서면서, 어색한 순간에 대한 탈출구가 생기는 느낌이 들었다.

문이 열리고 다시 출발하는 지하철 옆으로 나란히 걸어가는 미영과 영찬.

"그럼 다음에 또 봬요."
먼저 말을 건 것은 영찬이었다.
아직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면서 서둘러 작별 인사를 한 것도 어색했지만, 괜히 야구 보러 가자는 무리수를 두어서 거절을 당한 것이라는 생각에 어색한 상황을 빨리 마무리하고 도망치고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네. 야구 가자고 하신 거는 다음에 대답할게요. 저한테 가자고 해 주셔서 고마워요."

미영의 말에 영찬은 온몸에 다시 활기를 다시 찾는 기분이 들었다.
'휴, 거절당한 것이 아니었어!'

"아 그래 주세요! 꼭 같이 한번 가시죠. 그럼 다음에 다시 뵐게요, 안녕히 가세요. 참 점심 드시러 오시면 다시 뵐게요. 그럼…."
괜스레 말이 많아진 영찬은 두서없이 이 말 저 말을 내뱉고는 더는 나란히 걷기가 어색해서 한걸음에 서둘러 미영 앞으로 내딛기 시작했다.

뒤돌아볼 용기도 나지 않아 꽁지를 빼듯 도망가는 영찬에게 뒤에서 미영의 명랑한 대답이 들렸다.

"네 영찬 씨도 좋은 하루!"

영찬은 친숙한 짧은 표현으로 좋은 하루가 되라는 미영의 말을 듣고 즐거운 웃음을 지었지만, 차마 뒤를 돌아보지는 못하고 서둘러 앞을 향해 걸었다.

그 여자 이름은 미영, 그리고 자신과 함께 다시 만나 함께 야구 보러 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온종일 일하면서도 문득문득 입가엔 미소가 지어졌다.
같이 일하는 동료가 평상 시답지 않게 희죽거리는 영찬에게 뭐 좋은 일 있느냐고 묻기도 했지만, 딱히 대답할 것도 없어 별일 없다고만 대답을 하면서도 연실 싱글벙글.

그 날 하루는 영찬에게 그렇게 기분 좋게 끝났고, 그날 저녁 잠자리에 누워서 잠을 청할 때에도 길게 그 기분 좋은 여운을 즐겼다.

'왠지 조만간 미영 씨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설렘 속에 다음에 만나 나눌 이야기들을 미리 떠올리며 스르르 잠이 들었다.



*작가's talk;
첫 만남의 순간이 가장 강렬한 기억으로 남는 것 같습니다.
그 장소와 나눈 대화들, 온도와 습도 그리고 냄새와 분위기 까지도..
아마 그 좋은 기억은 온몸 깊숙한 세포들에게도 좋은 영향을 끼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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