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_16
얼마 전 너와 함께 떠난 해외여행에서 크게 다쳐 입원했었다.
필리핀에 도착한 첫날 리조트 수영장에서 미끄러졌는데 팔을 잘못짚어 탈골이 된 것이다. 뼈가 빠진 것을 처음 경험했을뿐더러 해외에서의 사고라서 더욱 무서웠다.
너와 나는 영어를 유창하게 하지 못해서 짧은 단어와 번역어플을 이용해 리조트 측 상주 간호사 '캐런'에게 상태를 알렸다.
나는 팔이 이렇게 무거운 줄은 처음 알았다. 중력이 이렇게 강하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도저히 걸을 수가 없어 휠체어를 타고 이동했고 캐런과 동행하여 50분 정도 떨어진 작은 병원에서 엑스레이 촬영을 했다.
촬영을 위해 팔을 이리저리 꺾는 것이 괴로워 비명을 질렀다. 입을 틀어막고 걱정의 눈빛으로 나를 보는 네가 낯설었다. 너에게서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촬영을 마치고 로비로 나와 결과를 들었다. 이곳에서 처치가 불가능하니 큰 병원으로 이동해야 한다고 했다. 큰 병원의 응급센터에 미리 연락을 취하고 답변을 기다리고 있었다.
의사는 고통에 정신없이 아파하는 나에게 진통제를 처방했다. 그 작은 알약이 사람을 쥐었다 폈다 할 수 있더라. 왜 전쟁이 나면 진통제가 그토록 소중한지 알 것도 같았다.
내 고통의 크기도 모르면서 의사는 심각하지 않다며 '안녕? 안돼. 사랑해'를 연신 말하며 자신의 한국어를 뽐냈다. 타국에서 느끼는 나의 공포를 위로해 줄 속셈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의사가 뽐내는 한국어에 뿌듯한 마음이 들어 고통을 잠시 잊었었다. 아픈 환자에게 장난을 칠 정도로 나의 문제가 심각하지 않구나. 생각이 들어 진정했던 것도 같다.
나는 곧 큰 병원으로 이동했고 입원절차를 밟았다. 리조트는 1박 예약을 한 상태여서 내일 체크아웃을 해야 했지만 퇴원시간이 명확하지 않아 짐을 당장 빼기로 했다.
너는 캐런과 함께 다시 리조트로 돌아가 체크아웃을 한 후 혼자 병원으로 돌아왔다. 왕복 2시간이었다.
밤 12시.
필리핀의 노후된 병실에 홀로 남아 너를 기다렸다. 고요 속에 가끔 간호사가 들어와 정체 모를 약물을 링거에 투입했다. 물어보니 진통제라는 것 같았다.
병실에 남아있는 나는 무섭지 않았다. 홀로 먼 길을 왕복해야 하는 네가 걱정됐다. 필리핀의 밤길에 모르는 사람의 차를 타고 혼자 공포를 견뎌낼 네가 너무나 걱정되었다.
병실의 문이 벌컥 열릴 때마다 입구를 향해 고개를 돌렸고 간호사에게 실망의 얼굴을 보였다.
무사히 돌아온 네가 기특했다. 또 미안했다. 나로 인해 고생하는 네가 안쓰러웠다.
다음날 새벽 5시에 의사의 호출이 있었다. 6시에 있을 수술에 앞서 의사를 대면한다고 했다.
모든 속옷을 탈의하고 헤어캡을 착용한 후 휠체어에 실려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유리문 안쪽으로는 보호자의 동행이 안된다고 하여 네가 복도에서 기다렸다.
간호사에 의해 들어간 곳은 수술실. 의아한 마음으로 간호사에게 짧은 영어로 물었다.
"나우 썰저리?"
간호사는 아니라고 한다. 저스트 상담이라고 하더니 수술대에 눕혔다. 산소가 나오는 콧줄을 끼웠다. 점점 불안해졌고 다시 한번 물어보았다.
"엠 아이 게링 슬립?"
수면마취 동의서를 쓴 기억이 났다. 간호사는 또다시 아니라고 했다. 아니라고 하기엔 모두가 수술을 준비하고 있었다. 겁이 났다. 필리핀 모국어로 대화하며 박장대소하는 그들의 모습도 공포스러웠다.
수술실을 둘러보았다. 주방 같았다. 여기저기 옷가지가 걸려있었으며 쓰레기봉투로 추정되는 것들이 바닥에 놓여있었다.
죽거나, 장기 적출을 당하거나, 수술이 잘 끝난다고 해도 후유증이 심하게 남겠구나. 하는 걱정이 머릿속으로 밀려들어왔다.
곧이어 의사가 들어왔고 사고 경위를 묻더니 또다시 정체불명의 약물을 링거에 주입했다. 의사에게 물었다.
"엠 아이 게링 슬립?"
"예스"
아. 잠든다. 안녕. 혹여나 내가 죽으면 나의 죽음을 파헤치고 병원 측으로부터 사과와 보상을 받을 때까지 이곳에 남아 끝까지 싸워낼 네가 그려져서 와중에 네가 걱정됐다.
이상한 꿈을 꿨다. 눈부시게 하얀 배경 속에서 누군가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 명은 노란색 모래로 되어있는데 형체가 마구 흘러내리고 있었고 나머지 한 명은 핑크색 젤리를 뒤집어쓴 형체였는데 마찬가지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잠에서 깨 눈을 떠보니 수술실엔 초록색 괴물이 앉아있었다. 무서워서 다시 누워 잠든 척을 하다가 정말 잠들었다.
잠시 후 다시 눈을 떴고 초록색 괴물은 유니폼을 입은 간호사였음을 알게 되었다. 눈을 뜨자마자 정면의 시계를 확인했다. 8시 30분이었다. 네가 복도에서 3시간 넘게 기다렸을 것이다. 의자가 없던 복도를 떠올리며 걱정했다.
침대에 뉘어 수술실을 빠져나갔다. 비몽사몽의 정신으로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너를 찾아댔다. 너는 아까 나와 헤어진 그 자리에 그대로 서있었다. 3시간을 넘게 서있었던 걸까. 병실에 가서 기다려도 되는데. 힘들게. 참 바보 같다.
예상했던 곳에 네가 없으면 서운해할 거면서 이런 생각을 하는 나도 참 바보 같다.
병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졸음을 참아가며 너를 바라봤다. 나 괜찮다고, 이제 팔이 움직인다고, 잘 깨어나서 여기 네 옆에 있다고 눈으로 말했다. 너는 나의 메시지를 못 알아들은 것인지 걱정의 눈빛을 거두지 못했다.
병실에 놓인 침대에 네가 걸터앉아 나를 살폈다. 마취가 완전히 깨지 않아 풀린 눈으로 가만히 바라보다 다치지 않은 팔을 들어 검지 손가락으로 너의 팔을 콕 찔러보았다.
"여기 있네"
네가 정말 내 옆에 있는 것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자다 깨다를 반복할 때마다 너를 불러 팔을 콕 찔렀다. 그때마다 여기 있다며 육성으로도 확인시켜 주는 너의 목소리가 살짝 젖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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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해외여행만 기다리며 힘든 생활을 꾸역꾸역 버텨왔었다. 하지만 첫날부터 다쳐 입원했고, 예약한 투어 상품들을 전부 환불받지 못했다.
퇴원 후에는 보험에 청구할 서류를 떼러 왕복 2시간 거리의 병원을 다시 방문했고, 아직 통증이 남아있어 고정기를 부착한 나 때문에 숙소에서 요양하는 것 외엔 아무것도 즐길 수 없었다.
씻는 것조차 혼자 할 수 없어 네가 씻겨주고 머리를 말려주었다. 기다려온 해외여행이기에 미안한 마음에 네가 나를 챙길 때마다 미안하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그때마다 너는 왜 미안하냐며 당연히 이렇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날 이후 3주가 지난 지금도 나는 고정기를 착용하고 있다. 아직까지 이어지는 통증에 너는 계속 고생하고 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내게 인상 쓰지 않았다. 불평과 불만을 하지 않았다. 내가 보는 너의 모습은 '기꺼이'였다. 내가 요청한 부탁에 단 한 번도 멈칫하지 않았다.
너의 손을 빌리는 것이 더 이상 미안하지 않다. 내 마음속에는 미안한 감정은 점점 사라지고 고마운 감정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 모든 순간에 네가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의 모든 순간에도 네가 있을 것이다. 네 옆에도 내가 있을 것이다.
언젠가 너도 나의 손을 필요로 할 때가 온다면, 내가 받은 것의 딱 두 배만큼 '기꺼이' 빌려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