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2.01 주일예배 설교
성찬식을 생각하면 평소보다 조금 엄숙한 분위기에서 떡과 포도주를 마시는 예식 정도로 생각합니다. 물론 그 시간에 나를 위해 돌아가신 예수님을 진지하게 묵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예수님이 베푸신 성찬에는 그것 이상의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오늘은 그 성찬에 대해서 한번 살펴보려고 합니다.
고전11: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11:24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예수님이 성찬을 언제 시작하셨는지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23절의 말씀에서는 “잡히시던 밤”에 성찬하셨다고 기록합니다.
'잡히시던 밤'이 어떤 밤입니까? 예수님의 생애에서 가장 어둡고 처참한 밤이었습니다. 배신자 유다가 슬그머니 자리를 떠날 때, 예수님은 곧 체포될 것을 직감하셨을 겁니다. "주님을 끝까지 따르겠습니다"라고 외치는 베드로의 눈빛 뒤로, 곧 "나는 예수를 모른다"며 부인할 비겁한 모습이 겹쳐 보였을 겁니다. 겟세마네에서 땀이 핏방울 되도록 기도했지만, 결국 십자가를 피할 수 없음을 아셨습니다. 다가올 고통과 죽음의 공포가 엄습해오는, 참으로 지옥 같은 밤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바로 그 순간, 예수님의 행동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24절입니다. '축사하시고', 헬라어 원어로 '유카리스테오', 즉 '감사'를 드리셨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것이 가능한 일일까요? 모든 것이 무너지는 절망의 밤에 '감사'라니요? 억지로 쥐어짜는 감사일까요? 하라고 하니까 의무적으로 하는 기계적인 감사일까요? 아니면 마음은 죽을 것 같은데 입으로만 중얼거리는 '정신 승리'일까요?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감사가 결코 정신 승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에서 터져 나오는 고백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3장 3절은 예수님의 마음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요13:3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성경은 예수님이 “아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닥쳐온 배신과 죽음이 실패나 사고, 재수 없는 일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안에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최악의 밤에도 공포에 잠식되어 숨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떡을 떼어 스스로를 내어 주시며 "아버지,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소멸'이 아니라, '한 알의 밀알'이 되는 과정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성찬을 통해 예수님은 감사기도를 할 수 있었습니다.
단순한 빵과 포도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예수님의 손에 들린 빵과 포도주는 예수님에게 감사의 조건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 내 몸이 찢기는 것은 아프겠지만, 이것이 섭리 안에서 생명의 빵이 되어 굶주린 사람들을 배부르게 할 것을 믿기에 감사합니다." "내 피가 쏟아지는 것은 끔찍하겠지만, 목마른 영혼들의 갈증을 채울 줄 믿기에 감사합니다."
이처럼 별것 아닌, 빵과 포도주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성찬의 시간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성찬이 바로 이래야 합니다. 교회에서 의무적으로, 의례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오늘 우리의 식탁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매일 대하는 밥상, 그 위의 쌀 한 톨을 다시 보십시오. 성찬의 마음이 없다면 그 쌀은 그저 '내가 돈 주고 산 상품'일 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성찬의 마음으로 그 쌀 한 톨이 밥상에 오기까지 하나님의 섭리를 보게 됩니다.
하늘에서 내린 적당한 비와 바람, 뜨거운 햇볕과 천둥소리, 그리고 땅의 비옥함... 이 모든 우주의 기운을 움직여 생명을 키워내신 하나님의 섭리를 보는 시간이 바로 성찬의 시간이라는 겁니다.
제가 좋아하는 홍순관 선생님이 이 쌀 한 톨의 무게라는 노래가 성찬을 잘 표현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쌀 한톨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 / 내 손바닥에 올려놓고 무게를 잰다 / 바람과 천둥과 비와 햇살과 / 외로운 별빛도 그 안에 스몄네 / 농부의 새벽도 그 안에 숨었네 / 나락 한 알 속에 우주가 들었네 / 버려진 쌀 한 톨 우주의 무게를 / 쌀 한 톨의 무게를 재어본다
이처럼 쌀 한 톨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느끼는 사람이 바로 참으로 성찬에 참여하는 사람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했습니다. 이 작은 것 하나에서 하나님의 보살핌을 믿는 자라면 모든 것에도 그러할 것입니다.
이런 성찬의 마음을 소유한 사람은 그 어떠한 고난 속에서도 정신승리가 아니라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하며 자신에게 닥친 어려움들을 감당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성찬은 일회성 이벤트나 행사가 아니라 매일 우리들의 삶에서 이뤄져야 합니다. 쌀 한 톨을 보면서, 혹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공중의 새를 보면서, 길에 핀 백합화를 보면서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섭리와 돌보심을 느끼며 감사하는 자들이 될 때에 바울의 기도가 이뤄질 수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빌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런데 오늘 우리는 감사하지 않습니다.
성찬을 통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쌀 한 톨을 묵상하지 않습니다. 그저 내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서, 나의 욕망을 위해서 빵과 포도주를 소비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 돈만 주면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처럼 생각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랬습니다. 선악과를 볼 때 마다 그들은 성찬의 마음으로 선악과를 동산 중앙에 두신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감사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움켜쥐면 내가 하나님이 될 것이라는 욕심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렇게 성찬의 마음이 없이, 하나님에 대한 감사함 없이 먹고 마시는 음식은 우리들에게 선악과가 됩니다.
저는 이것이 오늘날의 소비행위와 매우 유사하다고 봅니다. 현대 사회는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입니다. "돈을 냈으니 내 마음대로 해도 돼." 우리는 마트에서 물건을 집어 들며 생각합니다. "내가 적당한 가격을 지불했으니, 이건 이제 내 거야."
너무나 당연해 보이는 이 생각 속에 무서운 함정이 있습니다. 우리가 '소비자'가 되는 순간, 그 물건 뒤에 계신 하나님은 사라집니다. 이 물건이 여기까지 오기까지 있었던 하나님의 섭리도, 누군가의 땀방울도 볼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나의 돈'과 '나의 만족'만 남습니다. 우리는 나를 위해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처럼, 오직 나를 위해 그렇게 하나님 없는 소비행위를 합니다.
이런 소비가 물건을 넘어 사람에게도 향합니다. “적당한 돈을 지불했으니 괜찮다” 라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에서는 시급 만 원에, 동남아에서는 시급 천 원에 사람을 부립니다. 시장이 정한 가격대로 줬으니, 나는 그 사람을 내 맘대로 쓸 수 있는 ‘도구’ 처럼 여깁니다.
하지만 성찬의 눈으로 그 사람을 다시 보십시오. 그 사람은 '천 원짜리 노동력'이 아닙니다. 부모에게는 큰 기쁨이었으며, 고아였다면 홀로 역경을 이겨낸 인생입니다. 꿈 많은 어린 시절이 있었을 것이고, 때론 가족을 위해 자신의 꿈을 접고 희생한 인생일 지도 모릅니다. 한 가정의 가장일 수도, 누군가에게는 목숨보다 소중한 연인일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예수님이 자신의 살과 피를 내어 주실 만큼 사랑하신,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런데 성찬의 정신을 잃어버린 우리는 '소비자'가 되어 그들을 대합니다. "돈 줬으니 시키는 대로 해"라고 말하거나 나에게 이익이 되는지 판단합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을 이기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의 논리대로 살아가는 이유는 바로 이 성찬의 시간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꼭 어떤 특정한 예배당, 기도 시간, 성경 읽을 때에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 시간에 못 만나면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발을 동동 구릅니다.
그리고 정작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성찬의 시간대신에 온통 우리의 욕심을 채우기에 바쁜 것 같습니다. 쌀 한 톨에서, 공중의 새를 통해서, 길에 핀 백합화를 통해서 하나님의 섭리와, 그 분의 손길과 따스함을 느끼는 성찬의 참 의미를 잃어버렸습니다.
배고프면 그저 사먹는 쌀이 되 버렸고, 수많은 가축들은 키워서 돈을 버는 수단이 되었고, 길에 핀 꽃들은 바빠서 밟고 지나가는 장애물이 되어버렸습니다.
성찬이 사라지면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배운 이웃도 사라졌습니다.
가난한 자, 소외된 자, 소수자, 장애인, 외국인 노동자들은 나에게 이익이 되지 않으면 모른 척하거나, 나와 성향이 맞지 않으면 없는 사람 취급했습니다. 때론 그저 돈 몇 푼에 쉽게 부려먹는 노동력으로 생각합니다.
성도님들, 이젠 성찬을 회복해야 할 시간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배신하고 하나님이 없는 듯한 그 고난의 시간을 성찬을 통해서 준비를 하셨습니다. 빵과 포도주에 담긴 하나님의 섭리를 느끼며 당신이 이 세상을 위한 빵과 포도주가 되겠다고 감사 기도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곧 배신하고 자기를 버릴 제자들을 보면서 인간적으로 실망하지 않고, 그 안에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보면서 그들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대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예수님도 바로 이 성찬의 시간을 통해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자신의 구할 것을 간구하셨습니다.
교회에서 의무적으로 혹은 절기에 맞춰서 성찬을 하는 것을 멈추시고 오늘부터 성도님의 밥상에서부터 성찬이 시작되길 기도합니다.
그 식탁에 올라온 쌀 한 톨의 무게가 성도님에게 감사의 조건이 되기를, 그 식탁에 함께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이게 되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그렇게 성찬이 회복되고, 성도님들의 입에서 감사 기도가 흘러나올 때 나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다시 회복되며, 모든 사람들이 함께 주의 만찬에서 먹고 마시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