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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빵떡씨 Jul 24. 2019

[글로그 21] 망각

뇌세포가 기억이 철판 볶음밥인 줄 알고 박박 긁어서 싸그리 처먹은 것일까

대학에 입학했을 때 '예상보다 좋은 곳에 합격했다'고 생각했다. 우연히 초대권을 얻어 부자들의 사교 파티에 간 가난한 청년처럼, 나는 '실제의 나'와 '이 대학에 다닐 만한 나' 사이의 갭을 메워야 한다고 본능적으로 느꼈다. 내가 택한 방법은 책읽기였다. 빠른 시간 안에 문화인으로 거듭나야 했기 때문에 스무살에서 스물두 살 때에는 발작적으로 책을 읽었다. 고전소설과 '대학생에게 추천하는 도서 100'을 중심으로 와구와구 읽었다. 하지만 그 짓은 곧 그만두게 되었다. 내 원대로 문화인에 당도했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속한 곳이 사교 파티보다는 초등학교 앞 문구점 놀자판에 가깝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 동기들도 그저 고3에서 한 살 더 먹은 애들일 뿐이었고, '갭'은 겁에 질린 내가 만들어 낸 허상이었다. 나는 곧 동기들과 함께 책을 엉덩이 밑에 깔고 학교 잔디밭에서 술이나 와구와구 마셨다.




지금은 그 때처럼 닥치는 대로 읽진 않지만, 책을 읽지 않을 때의 불안감이 습관이 되어 아직도 꾸준히 읽는다. 불안은 뭔가를 하게 하는 큰 동기가 되기도 한다. 책을 자주 읽는다고 하면 '오호 이 자식 꽤나 박식하겠군'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고 읽는 족족 다 까먹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유난히 멍청한 것은 아닌 게, 어떤 유명한 작가도 책 내용을 모두 기억할 수는 없으며, 깊은 감명을 준 몇 문장만이 나중까지 가슴에 남는다고 했다. 근데 정말로 그렇다면 가성비가 너무 구린 게 아닐까. 아이템 다 때려 넣어서 무기 업그레이드 했더니 10번 중에 1번만 랜덤으로 성공하는 리니지도 아니고. 몇 천 페이지씩 읽어놨더니 그 중에 한두 문장밖에 기억하지 못 한다니. 책이란 재미도 없고 가성비도 없고 그저 관성에 따라 읽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누워서 책을 얼굴에 덮고, 배 위에 올리고, 머리에 베면서 했다.




지난 주말엔 본가에 내려갔다. 원래 보던 책을 들고 가지 않아서 집에 있는 책들을 뒤졌다. 가네시로 가즈키의 <Go>라는 책의 익살맞은 표지가 눈에 띄었다. 제목과 일러스트를 보아하니 이 표지에 그려진 남자애가 천방지축 사고를 치다가 가족애랄까 용기랄까 하는 어떤 깨달음을 얻게 될 거라는 촉이 딱 왔다. 한국인이라면 황정민과 이정재와 오달수가 나오는 영화 포스터만 봐도 줄거리가 주마등처럼 삭삭 스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책을 몇 페이지 보니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 '내가 책을 읽은 세월은 헛되지 않았다'는 흐뭇함을 느끼는 찰나 형광펜으로 줄을 그어 놓은 게 보였다.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산 책도 아닌데 왜 이런 게 있을까. 파르륵 책장을 넘겨보니 뒤쪽에도 듬성듬성 줄이 그어져 있었다.




'아... 읽었던 거구나..'




이제 내용을 까먹는 것도 모자라서 책을 읽은 여부까지 잊은 것이다. 뇌세포가 기억이 철판 볶음밥인 줄 알고 박박 긁어서 싸그리 처먹은 것일까. 어쩐지 낯설지 않다 했어. 그래도 나는 기억이 하나도 안 났기 때문에 처음 읽는 기분으로 책을 마저 봤다. 여기저기 밑줄 그은 문장이 많았다. 나는 웬만큼 감명깊지 않으면 밑줄을 긋지 않는데(중고서점에 갖다 팔아야 하니까) 이 책은 꽤나 좋았나보다. 그런데 지금 읽으니 도대체 어떤 포인트가 좋았던 건지 감이 안 왔다.




가네시로 가즈키 소설의 남자 주인공은 대부분 "이름따위, 중요치 않잖아"라고 얘기 하고 담을 훌쩍 뛰어 넘어 뒤도 안 돌아 보고 저벅저벅 걸어가는 불량청소년의 이미지일 때가 많은데, 아마도 스무살의 나는 그 캐릭터가 마음에 들었나보다. 주인공의 대사 곳곳이 밑줄이었다. 예컨데, '사랑이라는 거 말야, 가끔은 어떤건지 정말 혼란스러워' 같은 대사였다. 맙소사... 그런 감성에 공감하던 나는 어떤 사람이었던 걸까.




생각해 보면 내가 좋아하던 소설 중엔 '소년의 감동 성장기' 류가 많았다. 박민규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나 <핑퐁>,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 등등 아무튼 소년이 있어야 하고 아무튼 성장해야 했다. 나는 사랑에 괴로워하거나 꿈을 찾거나 현실을 버텨내는 소년들을 동경했다. 그래서 대학생 때는 그런 소년스러운 분위기를 흉내내기도 했다. 보통은 무심하고 때로는 열정적이고 가끔 충동적이고 또 엉뚱하기도 한 대충 그런 느낌을 소유하고 싶어했다. 그런 동경이 본래의 수줍고 신비롭고 나태한 본성과 뒤섞여 끔찍한 혼종이 되었다. 예컨데 수줍게 허세를 부리는 그런 끔찍한... 아가리로만 열정을 어필하는 아주 끔찍한...




꼭 성장소설이 아니더라도, 스무살 때는 책을 읽는 족족 감동을 받곤 했다. 책을 읽을 때마다 좌우명이 바뀌었고, 책에서 본 좋은 문장을 적어두는 공책도 있었고, 새벽까지 책을 보다가 해가 뜰 때까지 생각에 잠긴 적도... 아니다 이건 기억 왜곡이다. 나는 잠이 많다. 아무튼 감동의 스펙트럼이 넓어 자주 감동을 받곤 했다. 최근에도 비슷한 설렘을 느끼고 싶어서 성장소설을 찾아 읽었다. 하지만 스무살 때 성장 소설을 읽을 때만큼의 감흥은 없었다. 시무룩하게 '쪼꼼 유치한걸...' 하며 덮게 되었다. 지금의 나에게 소년과 성장은 유효하지 않은 이야기가 된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크게 늙은 기분이지 뭡니까...




요즘엔 책을 읽어도 없는 불알이라도 탁 치며 '이것이다!'하고 감명 받는 일이 별로 없다. 손에 뭔가를 쥐고 눈알을 굴리는 습관만이 남았다는 생각이다. '그거라도 남았으니 어디야'라고 말한다면 할 말은 없습니다. 하지만 전보다 확실히 감동에 박해졌다. 마치 재래시장 반찬가게 사장님이 '재래시장은 인심이 좋지!'하며 찾아온 사람들의 기대에는 부응하고 싶은데 실제로 인심이 좋지는 않아서 메추리알 반 알 정도 더 얹어주는 것처럼 '옛다 여기 감동 한 방울 반!'하고 감동의 즙을 짜내는 사람이 되었다.




'감정이 메말랐다니, 노인네 같은 소리를 하네'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노인들도 한 번에 감정이 메마른 것이 아니라 나와 같은 과정을 조금씩, 하지만 확실히 거치다 문득 고개를 들어 보니 감수성이 많이 사라졌다는 걸 깨닫게 되는 것이니 나는 그들보다 현명하게 좀 더 빨리 알아챘다고 볼 수 있다.




내 감정의 빈곤화는 2년 간의 회사생활 때문이던가, 아니면 감동의 촉수도 살에 파묻혀 제기능을 못 하게 된 것인가. 알 수 없다. 혹시 감동 재활 운동이란 것은 없을까. 감동 받는 기능을 활성화 시키고 감각을 예리하게 벼릴 수 있는 운동 말이다. 그런 것이 있다면 월에 2만 원이라도 주고 회원권을 끊을 용의가 있다. 망각의 동물이라는 닉값을 너무 열심히 하느라 무슨 책을 읽었는지, 어떤 마음이었는지도 다 잊어버린 나에게 꼭 필요해보인다.




+ 전세로그 7.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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