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에케르트와 한국 근대음악사 이야기
때는 2001년. 거의 20년, 아니면 불과 20년 전의 이야기다.
그때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로 짧게 여행을 간 일이 있었다. 당시만 해도 몽골은 지금보다 훨씬 덜 개발이 되어있었다. 가기전 가이드분께서 "몽골의 지금은 한국의 60년대와 비슷하다"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실제로 가보니 TV 드라마에서 보던 그 시절의 모습과 세트장 같이 똑같아서 놀랐다.
내가 묵었던 울란바토르 시내의 호텔이 그 지역에서 거의 유일하게 온수와 화장실을 편히 쓸 수 있는 곳이었다. 수도의 시내 한복판도 우리나라의 지방도시 수준이었고 도심을 벗어나면 그때부터는 유목민의 삶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어느날 몽골에서 선교 활동을 하고 있는 한 선교사님의 안내로 그들의 문화속으로 들어갈 기회가 있었다. 그 분은 일반 가정을 안내해주시기도 했고 관공서등 일반 여행자라면 갈 수 없을 곳들을 자신의 네트워크를 통해 보여주셨다.
그날은 그 분이 시내에 있는 한 학교를 보여주시기로 한 날이다. 사실 며칠전 움막학교 같은 마을 시설은 본 적이 있는데 건물이 있는 근대적 교육 시설을 보여주신다고 하니 궁금하기도 하고 호기심이 발동했다.
학교의 별도의 환영이나 안내는 없었다. 조용히 복도를 지나가며 수업중인 교실의 모습을 흘깃 보았다. 어떤 반은 언어(몽골어)를 배우는 듯 했고 또 어떤 반은 밖에서 체육활동을 하고 있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한 교실의 모습이 나의 발을 잡았다.
*
그 반은 음악 수업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학생들이 음악책을 합창단처럼 들고 같이 노래를 부르고 있는 모습이었다. 음악이라고 하기엔 사실 초라한 모습이었다. 내가 어렸을 적엔 교실에 풍금이라도 있었는데 당연히 그런 것도 없었고, 빔프로젝터는 물론이거니와 OHP필름 같은 것도 없으니 괘도라 부르는 큰 종이에 가사를 적어 놓은 것을 교사는 앞에 세워두고 아이들에게 노래 지도를 하는 모습이었다.
몽골의 동요로 보이는 노래를 듣는 것만으로도 신기하기도 하였으나 내가 특별히 음악에 관심이 있어서 더욱 발걸음을 떼지 못했던 이유도 있었다. 지금으로서는 무모하지만 그 당시엔 나는 음악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지내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일행 중에선 가장 이 분야에 관심이 있는 사람으로서 다른 일행들이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겨도 나는 뒷문 창을 통해서 수업의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런데 놀라운 것을 발견했다.
건반이나 반주가 없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데, 학생들의 책을 보니 오선 음표로 된 악보가 없었던 것이다.
그냥 갱지에 가사만 적어 놓은 책을 묶어 교과서로 쓰고 있었다. 사실상 구전이었다. 내가 어렸을 적인 80년대에도 풍금은 있었는데 여기는 아직 70년대에 있는 것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궁금해서 안내를 맡아주신 선교사님을 통해 현지 교사에게 물어보았는데 그 대답이 정말 충격적이었다.
"몽골에는 아직 (오선)악보가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순간 머리가 띵했다. 서양에서는 천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는 오선 악보가 이곳엔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니. 한때는 그 유럽을 지배하기도 했던 나라이지만 자신의 고유문화를 지키며 살다보니 서양의 문화가 들어오는 일은 아직 더디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
그날밤 일행과 저녁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그 선교사님이 나를 따로 부르셨다. 뭔가 중요한 할 말이 있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리고 놀라운 제안을 주셨다.
내용인즉슨, 자신이 여기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는데 교육이나 문화사역을 하는데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다며 혹시 생각이 없느냐는 이야기를 하시는거다. 당시 일행중에서 내가 특별히 음악적 경험이 있다는 것을 아시며, 아까 학교에서 보지 않았느냐. 여기는 아직 악보를 볼 줄 아는 사람도 없다. 다른거 몰라도 와서 오선지 읽는 것만 가르쳐주어도 얼마나 달라지겠느냐라는 이야기를 하셨다.
귀국 전까지 한번 고민해보고 의견을 달라고 하셨고 나는 남은 일정 내내 잠을 제대로 못자면서 고민을 했다. 뭔가 굉장히 도전적인 동기부여였다. 나는 그때 프란츠 에케르트(Franz Eckert, 1852.4.5 ~ 1916.8.6)가 떠올랐다.
조선에 최초의 서양악기가 들어오게 된 것은 1876년 일본과의 병자수호 체결을 계기로 문화를 개방하게 되면서 1882년 미국과의 통상조약을 필두로 차차 러시아, 프랑스 등과 통상을 하게 된 것이 시발점이 되었다. 1895년(동학혁명이 일어났던 이듬해) 조정에서는 러시아식 나팔대를 설치하고 러시아 교관으로 하여금 훈련을 시키게 하였는데 이것이 최초의 근대 악대의 탄생이었다. 이후 조정에서는 근대적 의전음악기관을 만들기 위해 수소문하다가 에케르트를 찾았다. 독일인 음악교사인 그는 이미 일본 조정의 초청으로 1879년 왕립일본해군의 자문으로 맨땅에서 일본의 근대서양음악을 홀로 다 셋팅한 이력이 있었다. 지금 일본의 국가인 기미가요를 작곡한 인물이기도 하다. 조선의 조정에서는 그를 왕실 군악대의 ‘군악교사(軍樂敎師)’로 초청하여 3년간의 기한으로 황실 군악대를 맡기로 하였다.
그 이후 그가 남긴 역사의 자취는 실로 위대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입국 당시 피콜로, 플롯, 오보에, 클라리넷(각종), 색소폰(각종), 트럼펫(Bb), 코넷(G), 호른, 트롬본, 수자폰, 바순, 튜바, 드럼, 트라이앵글, 탬버린, 캐스터네츠, 벨 등 총 52점이나 되는 양악기(洋樂器)를 가지고 들어왔는데 이것은 우리나라의 현대 음악사에서 하나의 사건이라고 할 만한 일이었다. 또한 에케르트는 악보 보는 법에서부터 시창법, 악기의 연주법이나 악기 손질하는 법까지 모든 것을 혼자 맡아서 지도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지 놀랍거니와 그는 실로 혼자서 이 나라의 서양음악사의 모든 씨앗을 뿌린 것이었다.
이후 그의 오케스트라는 일제시대 이황직악대(李皇職樂隊)라는 명칭의 군악대와 경성악대 등 다양한 과도기를 거쳐서 1946년 해방 후 한국군의 창설과 같이 하여 최초의 국군 군악대가 창설되고 이후 미군의 군악대를 본딴 군악대들이 속속 출현하였다. 이것이 오늘날 근대적 악단이 탄생한 역사다. 여기서부터 우리나라의 근대 음악이 오케스트라와 밴드음악의 두 줄기로 발전을 시작한다.
한국 전쟁 이후 미군악대의 캄보밴드(Combo Band, 소인조 그룹사운드)를 통해 재즈 및 실용음악이 급속히 전파되었고 이 당시 미군밴드에서 같이 활동하던 한국인 아티스트들은 현재 한국의 “재즈 1세대”, 혹은 “음악 1세대”등으로 불리며 근대 가요발전에 이바지 했다. (신중현, 류복성 등). 이들이 2세대와 3세대로 이어지면서 오늘날 수많은 재즈밴드 및 소인조 밴드로 발전하였다. 경성악대에서 훈련받은 이들이 한국전쟁과 미군정기를 통해 군악대로 들어왔고 이들이 전쟁 이후 밴드 뮤지션으로 재즈를 시작하게 된 것.
한편 경성악대의 해체로 말미암아 프리랜서가 된 과거의 양악대원들은 1928년 경성제국관현악단을 조직하였다. 이것은 후에 1934년 경성관현악단, 1936년의 경성방송관현악단으로 보다 전문적인 교향악단의 시대로 진입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이후 1940년 한국 최초의 본격적인 민간 심포니 오케스트라였던 조선교향악단은 경성관현악단과 경성방송관현악단 단원들이 주축이 되어 탄생하였는데 이것은 곧 이 일련의 단체들이 연속성을 가지고 그 태생의 흐름을 유지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렇게 끈질기게 명맥을 유지하던 한국의 양악은 6.25 전쟁을 맞이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각종 민간음악단체들은 전쟁으로 인하여 해산을 하거나 활동을 중지하게 되었지만 반면에 9.28 서울 수복을 계기로 음악인들은 ‘군대’에서 재집결 하게 된 것이다. 당시 모든 사회환경이 軍 이라는 패러다임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군대는 전시(戰時)라는 특수한 상황속에서 음악인들이 재집결 하는데 구심점이 되어주었다.
한편 이 당시 軍을 중심으로 집결된 한국 양악(특히 관악) 연주자들은 크게 두 가지 흐름으로 갈라진다.
첫 번째는 1946년 3월 8일 최초의 근대적 형태의 군악대인 '육군 군악대'가 창설이 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1951년 이와는 별도로 창단된 ‘육군 교향악단’이다.
육군 군악대는 1946년 제 1연대 군악대로 창설된 이래 1948년 육군 본부 군악대로 개칭되고 이후 8개의 군악대가 연달아 창설되었다. 1949년 창설된 군악학교는 당시 유일무이한 국가 음악교육기관으로서 이곳을 통해 휴전 후 한국 음악계의 주축이 되는 수많은 음악가들이 배출되었다. 뿐만 아니라 육군 교향악단 역시 이 군악학교 내의 연주하사관과 본관 2기생을 주축으로 연주자들이 편성되었으므로 광의의 개념으로서 이 둘을 구분하는 것은 바람직 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둘을 구분하게 된 것은 휴전이후 성장하는 노선이 각기 다르게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육군 군악대는 6.25 전쟁 발발이후 휴전 협정 전까지 수도사단 군악대(1950. 9. 21)을 비롯하여 11개 부대가 창설되었고 이후 월남전 해외파병(1965), 국악대(國樂隊)창설(1968), 아시안게임(1986), 서울 올림픽(1988), 한일월드컵(2002) 등 큰 행사들을 거치며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한편 육군교향악단은 1951년 5월 17일 부산 동아극장에서 창단기념연주회를 개최한 것을 시작으로 1956년 제22회 정기 연주회를 마지막으로 발전적 해체를 하고 KBS 심포니로 개편되었다. 방송국의 전속 악단이었던 KBS심포니는 1969년 2월 다시 국립교향악단으로 개편되었고 경제발전기에 한국의 음악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 1982년 KBS 교향악단으로 인수되어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다.
이와 병행하는 흐름으로는 육군교향악단보다 1년 앞서 창단된 ‘해군문화선무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쟁 발발 직후 육군과 마찬가지로 해군에서도 음악단을 조직하였는데 이 해군문화선무대는 이후 1950년 10월 1일 소속 대원 120명 전원을 해군문관으로 임명하여 ‘해군정훈음악대’를 창설하였다. 이후 해군정훈음악대는 1956년 3월 28일 시공관에서 개최된 정기 연주회때부터 명칭을 ‘해군 교향악단’으로 바꾸고 부대홍보와 장병사기양양을 위한 위문연주 위주의 정훔음악대가 아니라 정규 교향악단으로서 활동영역을 넓혔다. 해군 교향악단은 1957년 3월 문화예술사절단으로 싱가포르, 홍콩, 대만등 해외순방연주도 성공적으로 마치며 지명도를 높혔으며 이 연주여행을 마치고 ‘서울시립교향악단’으로 재발족하게 되었다. 당시 서울시림교향악단의 창단은 해군교향악단을 서울특별시가 흡수하여 된것인데 이후 1978년 7월 단체운영권이 서울시에서 세종문화회관으로 이관되면서 세계적인 연주회장을 확보하며 명실상부하게 한국을 대표하는 오케스트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양대 관현악단인 KBS관현악단과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역사이다.
여흥을 위한 음악 이었던 서양음악이 교육의 목적을 갖기 시작한 것은 고교 관악부 및 고적대의 발전과 동시에 시작되었다. 당시 전역한 군악간부나 미군 빅밴드에서 활동하던 뮤지션 중 교사로 활동하던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관악부를 창설하였다. 이후 고교 관악부는 아마추어 연주자 양성의 산실이 되었고 그곳을 거쳐간 수많은 사람들로 인해서 잠재적인 관악음악의 저변 확대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우리나라가 지금보다는 덜 입시위주 교육에 찌들어있던 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중고교에 관악단은 널리 있었다. 미국이나 일본에서 스쿨 마칭 밴드들이 왕성히 활동하는 것처럼 우리도 그러했다. 그 명맥을 잇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쉽지만 여튼 프란츠 에케르트 한 사람이 뿌린 씨앗의 결과는 이처럼 우리나라의 근대음악사를 아우르고 있다.
*
나는 어쩌면 몽골의 프란츠 에케르트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해봤다.
몽골의 음악역사에 최초로 오선 악보를 가르친 교사 또는 최초의 근대적 음악교육기관을 만들 수 있었을 수도 있었을까.
그와 같은 전문 음악인도 아니고 그만큼 많은 악기들을 다룰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실기 교사들은 데리고 오면 될 일이었다. 악보나 건반이나 기본적인 악기들은 직접 가르치는 것도 가능했다. 과연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군대 문제 등이 있어서 아쉽게도 정중히 고사했다.
지금의 울란바토르는 테크도시로 변하고 있다. 음악교사가 아니라 영창피아노 대리점을 내고 몽골 시장의 판매권을 독점했으면 돈 많이 벌었을거다. 20년 전에는 오선 악보도 없던 곳이었지만 지금은 야마하 뮤직아카데미도 들어와있고 노래방도 곳곳에 있다. 최근에 저 곳을 다녀온 친구의 말에 의하면 한국의 2000년대 수준까지 올라왔다고 한다.
그 나라에는 다행인 일이지만 나에게는 어쩌면 큰 기회를 놓칠뻔 한 것이 아니었을까. 아니면 그냥 나의 망상이었을까. 그 이후 비슷한 기회를 아프리카 국가에서도 본 적이 있다. 하지만 그 기회도 잡지 못했다.
지금의 나는 사업가로서 사업의 기회를 늘 보고 있다. 나는 새로운 사업의 기회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프란츠 에케르트를 떠올린다. 혼자서 오롯이 오합지졸인 조선인 스물댓명을 가지고 단 몇 달만에 종각에서 오케스트라 레파토리를 연주했다. 기록에 따르면 매우 훌륭한 연주였다고 하고 그 당시 연주곡 리스트만 보아도 도저히 지금 기준으로도 입문자 몇 개월 가르쳐서 할 수 없는 곡들이다. 그런 그의 노력과 유산이 오늘날 KBS관현악단과 서울시향까지 온 것은 정말 위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누군가는 사업에서 빅데이터 산업의 에케르트, 블록체인 산업의 에케르트를 꿈꾸고 있을거다. 그 한 사람으로 인해 생태계가 만들어지고 성장하는 꿈 말이다. 나 역시 그러하다.
그를 생각하며 드는 한가지 교훈은, 다시는 중요한 결정의 순간에 머뭇거리지 말자는 거다.
오늘도 많은 의사 결정을 앞두고 불현듯 백년전의 프란츠 에케르트와 20년전의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