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점도 없고 가게도 없다. 상수도 대신 지하수가 선물처럼 공급된다. 없는 게 많지만, 덕분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들이 보장된다. 그래도 우체부와 배달원이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당분간 나는 나와 함께 걷기로 했다 中-
어릴 적 고향이 떠올랐다. 전국에서도 손에 꼽을만한 시골이었지만, 가게가 아예 없었던 건 아니다. 소가 사라진 외양간 소구유에 소고기 라면이나 이백냥 라면, 자갈치 문어맛, 새우깡 정도를 담아놓고 파는 집이 있었다. 가게라고 하기엔 좀 그렇고 소일거리 삼아 읍내에서 물건을 떼다가 조금의 이윤을 붙여 파는 수준이라고 보면 된다. 영업시간은 따로 없었고, 집주인이 농사일 안 나가고 집에 있을 때만 구매할 수 있었다. 읍내에 한 번 나가려면 하루 몇 번 없는 시간차(버스)를 잡아타고 나가야 했고, 라면 하나만 사 오려고 해도 한나절을 꼬박 허비해야 했으니 이래저래 궁색한 가게라도 감사했다.
우리 집은 담배 가게였다. 역시나 정식으로 사업자를 낸 가게가 아니었고 그냥 안방 TV장에 담배를 쌓아두고 파는 그런 수준이었다. 솔, 도라지, 백자, 장미, 88, 라일락 같은 담배가 TV장에 가득 쌓여있었는데, 그 때문에 항상 집에서는 담배 특유의 냄새가 났다. 마른 잎과 오래된 책, 나무 향과 가죽 향, 견과류 향이 합쳐진 듯한 냄새였는데 그 후각적 기억이 여전히 남아서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를 코에 가져다 대면 어릴 적 안방의 모습이 떠오른다.
매주 수요일이면 담배인삼공사 탑차가 왔다. 아버지는 재고가 부족한 담배를 적어두었다가 탑차가 오면 담배를 떼었다. 가끔 아버지가 바쁘면 담배 이름이 적힌 종이를 나에게 건네주곤 했다. 그럼 열 살쯤 되었을 내가 담배인삼공사 직원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오늘은 솔 다섯 보루하고 88 두 보루, 그리고 라일락 한 보루면 되겠네요.
우체부는 눈이 오는 날을 제외하곤 매일 방문을 했다. 눈이 오면 읍내에서 우리 동네까지 오토바이를 타고 올라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읽으시던 서울신문은 늘 날짜가 하루 늦었다. 그날 나온 신문을 그날 배달받기에는 너무 벽지였다. 하루쯤 늦게 세상사를 알아도 전혀 문제 될 게 없는 시대였다.
귀촌을 한 저자가 원하는 삶도 그런 삶이 아니었을까. 하루쯤 늦게 세상사를 알아도 전혀 문제 될 게 없는 삶. 뭔가에 쫓기듯 살지 않는 삶. 내가 유독 유년시절을 그리워하는 이유도 같은 이유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