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행기

영국과 독일을 경유해 4년 만에 한국을 찾다

by 최미연

4년 만에 한국을 다녀온 이래 며칠 마음에 작은 불덩이가 내려 앉은 기분이었다. 불이 더 번지지 않게 일상을 바삐 움직이니 몸이 부대꼈는지 얼굴에 홍조끼가 돌았다. 불과 일주일 새 이야기다. 이 불을 어떻게 가지고 가야하지? 꺼지기는 할 건가? 지체없이 슬픔이 덮쳤기에 이 글을 빌어 나 자신에게 좀 더 솔직해져 보기로 한다. 이 글을 보고 누군가의 마음을 더 슬프게 하고 싶기보다 씩씩하게 잘 살아보겠다는 다짐의 선언이기도 하니까. 이전엔 슬픔을 드러내는 일이 수치스럽기도 했는데 더는 그렇지 않게 생각하기로 했다. 슬픔이 가질 수 있는 힘의 존재를 분명 느낀다.


4년의 시간. 어떤 감정과 풍경을 마주하게 될 지 가늠이 안되었기에 설렘보다도 두려움이 앞섰다. 비행기가 한국 땅에 착륙하는 순간 공황이 덮쳤고 한국인 인파가 가득 찬 비행기 안에서부터 모든 것이 낯설고 당황스러웠다. 독일에서라고 대규모 인원의 한국인들을 아주 볼 일이 없는 건 아니지만 독일에 체화되지 않은, 한국인의 기운은 어딘가 모르게 달랐다. 또 하나의 차이는 그들은 유럽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이었지만 나는 고국을 이제 막 여행자로 찾을 참이었다는 거다.


살면서 한국을 여행으로 온다는 일은 상상도 해 본 적 없는 일이다. 한국을 찾으면서 편도행이 아닌 왕복 비행기표를 끊다니. 그렇게 나는 당분간은 더 재외국민일 신분으로 돌아왔다. 이처럼 때때로 내 마음이 도달하기도 이전에 나의 일부는 그렇게 꼭 선언을 해버리거나 예약을 해버리거나 일을 벌려둔다. 강단 있게 촘촘히 쌓아 올려 밀고 가는 선택들도 있지만 삶에서 중대하다고 여겨지는 지점들은 대체로 이렇게 언제인가 쏘아져 올린 사고들을 수습하는 양 따라가면서 만들어진다. 그렇다고 주체성이 떨어지냐. 그건 또 아니다. 지 딴에 생각이 아주 없어서 그런건 아니니까. 지도 이제 경험치가 쌓인 어른인데 생각을 했겠지.


그대로 집에 갔으면 긴장이 더 오래갔을텐데 다행이 익숙한 얼굴의 친구가 어제 본 양 꽃과 플랜카드를 앉고 마중을 나와줬다. 우리는 비빔밥에 ‘카스’ 맥주를 함께 마시며 ‘잠시 귀국’을 축하했다. 4년 전 영국으로 떠나던 날에도 공항에 나와줬던, 한 챕터의 장을 열고 닫아 준 혜민이다. 왕복 2시간 전철을 타고 와서는 1시간 가량 기다렸다가 밥만 사주고 어서 부모님댁에 가라며 등 떠밀고 홀연히 사라졌다. 그러고선 4년만에 1시간 남짓 얼굴 보고 자기는 나 출국 전에 또 못 만난대도 괜찮다라는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한다.


욕심 내지 않고 배려해주는 마음에 괜히 울컥하고 썽이 난 나는 그게 뭔 소리냐며 그를 향한 미래의 시간을 품에 안고 공항 버스에 탔다. 그러면서 정말 혹시나 다시 못 보고 가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에 겁이 난다. 이제는 ‘언제 보자’라는 말이 정말 기약 없이 허공에 흩어질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어쩌자고 고작 18일을 왔는가. 속상하면서도 또 그럴 수 밖에 없었던 마음을 알기에 공항에서 내린지 몇 시간도 안되어 애가 닳기 시작한다. 한국을 찾는건 얼마나 더 지속될 지 모를, 기약 없는 이민 생활에 어떤 한 기점이 되었다. 비행기를 타고 오는 내내 지난 객지 생활의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스쳤고, 미뤄둔지도 몰랐던 감정들이 기다린 양 부글부글 올라왔다.


영국 간지 3개월 만에 돌아가신 할아버지 소식에 종일 울다가 룸메와 당시 애인이 밥 먹여주고 맥주 사 준 날,


코로나로 찾아 온 오한에 침대에서 데굴데굴 구르며 정말 나 혼자구나 싶었던 날,


아는 사람 없는 도시에서 온라인으로 알게 되어 처음 만난 친구가 자신이 만들어 온 당근 라페를 건네주던 날,


11시간 근무하고 당 땡겨서 산 5파운드짜리 도넛 먹으며 돈 아낀다고 땡땡 부은 다리로 1시간 동안 집에 걸어간 날,


모욕감을 준 매니저에게 항의하는 이메일 쓰려 퇴근하고 밤새 사전 찾아가며 머리 쓰던 날,


동료들 5-6명 집에 불러 좁은 2층집 부엌에서 애들 밥해주고 트월킹 배운 날,


공황이랑 전신 경련 와서 응급실 실려가고 그 다음날 애인한테 욕 먹으면서 기어코 동료들이랑 송별 여행으로 마게이트 간 날,


독일 와서 팔 부러지고 깁스 한 날 수술 할 지도 모른다는 얘기에 헛웃음 쳤던 응급실에서의 풍경,


독일 첫 겨울, 방에서 옷을 겹겹이 껴입은 채 보일러 앞에 쭈그려 앉아 한국에 돌아갈까 생각했던 날,


같은 겨울 식당 설거지 떼꾸정 물에 절은 신발을 신고 집에 돌아가는 길 한국에서 나본다고 온 친구가 맥주 사서 기다려줬던 날,


다음해 봄 애인과 헤어지고서 침대에 온종일 누워 어떻게 죽을까 고민하고 다음날 심리 상담 신청했던 날,


할머니 돌아가신 날 이제는 미워도 그리워도 더는 그 얼굴을 볼 수 없구나하는 생각에 또 울다가 혼자 글쓰며 내 방에서 장례를 치룬 날,


일주일 새 부고를 3건 연이어 들은 뒤 그 애인과 또 헤어지고서 여름 내내 간신히 나를 하루 하루 살려냈던 나날들.


그 외에 나눌 수 없는, 무수한 슬픔과 기쁨들이 오롯이 내 안에 새겨졌다.


조금씩 힘 빼면서 마음을 살피며 산다고 해도 이민자 그것도 자영업자의 삶은 때때로 그마저도 사치처럼 느껴지는 때가 있다. 생존에 급급해지면 어떤 감정들은 눈치껏 물러날 줄도 알아야 한다. 아니 밀려난다. 그래서 슬픔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거의 저항에 가까운 일이기도 하다. 그래, 먹고 사는 거 중요한데 네 마음 하나 다스리지 못하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이제는 양육자, 부모로부터 듣고 싶은 말을 기다리기 이전에 내가 스스로에게 애정을 있는 힘껏 떠먹여줘야 한다. 왜냐. 나는 4년의 시간을 연고 없는 두 대륙에서 온갖 설움 다 겪으며 나를 지켜냈으니까.


18일 남짓한 짧은 시간 내에 가능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가고자 했음으로 엑셀표를 만들어 하루 하루 시간, 장소 별로 동선을 짜는데 안간힘을 썼다. 그나마 욕심을 덜 수 밖에 없었던건 시차적응이 생각보다 더 오래 걸린다는 점 그리고 모두 모처럼의 만남인데 쫓기듯이 만나고 싶지는 않았던 것. 3월 첫 주, 화요일 밤에 도착하고 하루는 날을 꼬박 새우다시피 했고 양 이틀간 집에서 먹고 자며 엄마와 방울이와 밀린 안부를 주고 받았기에 사실상 외부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갈 수 있는 시간은 2주가 안됐다.


오랜만의 만남인데 왜 시간을 더 길게 잡고 오지 않았느냐는 원성들이 있었고 나도 어느 순간 그에 동의했다. 그러나 방문이 길어질 수록,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날 수록 지출이 생길 것이고 당장 독일로 돌아와서 언제 얼마만큼의 수입이 들어올 지 모르는 프리랜서의 삶은 마음을 조금씩 바싹 말렸다. 그러다가 한 명, 한 명 친구들이 삶의 피로와 병과 싸우고 있는 시간들에 대한 슬픔이 파도처럼 몰려들면 그 바싹 말랐던 마음이 맥을 못추고 팔랑팔랑 휩쓸렸다. 동네에 사는 친구는 내가 이민자의 삶을 흙에 뿌리내리지 못하는 수경재배라며 정착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삶에 비유하니 본인 집에 몇 년째 바스켓 속 물에 담가 팔팔하게 자라고 있는 식물을 보여줬다.


나는 어쩌면 해초일 수도 있지. 그래, 누가 볼 땐 맨날 울고 덩치값 못하게 히마리 없이 나부끼는 것처럼 보일 수 있어도 어쨌건 나는 일이 있건 없건 갑상선 호르몬제 먹인다고 매일 아침 7시 반에 무슨 일이 있어도 일어나고. 아침을 맥이고.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날의 피로와 마음의 우울을 씻어내려 외출을 하지 않아도 애(나)는 꼭 샤워를 시키고. 이제는 15키로에 이르는 촬영 장비도 한 손으로 들을 수 있고. 독일어 학원 다닐 형편이 안되지만 3년 차에 왠만한 독일어 뜻은 다 모르더라도 읽을 수 있는 수준에는 이르렀고. (실제로 독일에 돌아온지 3일만에 나간 촬영에서 청소년 3명이 나의 독일어를 후하게 칭찬해주었고 그 다정함에 독일어를 향한 애정이 더 커졌다.)


당연히 날 못 알아보거나 피할 거라 생각했던 우리집 고양이가 내가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저 방문 끝에서 날 주시하는 모습을 발견했다. 원체 겁이 많은 애여서 복도에 누가 지나가는 소리만 들어도 숨던 애였는데 조심스레 자세를 낮추고 손가락을 갖다대니 다가와서 냄새를 맡았다. 그 모습이 너무나 고맙고 신기해서 엄마 얼굴을 보고도 참았던 눈물이 수도꼭지 열린 양 콸콸 쏟아졌다. 같이 살 때는 내 몸을 지 몸 마냥 밟고 지나다니던 애였는데 이제는 곁은 줄지언정 내가 바닥에 누워서 자면 먼 길을 우회해서 돌아갔다. 이따금 전화기 너머로 소리만 들리던 언니인데 갑자기 그 형체가 다시 눈 앞에 나타났고 또 사라지는 이 과정을 방울은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일까. 지난 주말엔 엄마랑 통화하는데 방울이가 옆에서 내가 하는 모든 말에 대답을 해 엄마를 울렸다. 분명 형체가 있었는데 어느 틈에 다시 전화기 속으로 들어가버린 나.


방울이가 있음으로 고된 엄마 아빠의 집에 해가 들고 웃음이 깃들었다. 엄마는 나와 방울이를 입양했던 당시 결심했던 것 이상으로 그를 오냐오냐 키웠다. 새벽 3시에 지 목 마르다고 엄마 귀에 꼬장꼬장한 소리로 자는 사람을 깨워 그릇에 막 따라준 물만 마시는, 고약하면서도 미워하기 힘든 응석받이가 되어 있었다. 외동이었던 나의 빈 자리를 엄마는 방울이에 대한 무한한 애정으로 채웠다. 사랑이 마를 틈이 없는 사람이다. 나도 그렇게 키워서 내 마음이 그렇게 주책없이 늘 자꾸 넘치나보다.


엄마와 아빠 둘 다 영상 통화로 이따금 얼굴을 봐서 그런지 흰 머리가 조금 는 것 이외에는 달라보이지 않았지만 며칠이 지나니 행동이 그전만치 민첩하지 않은게 느껴졌다. 엄마는 내가 떠나기 직전 급하게 백내장 수술까지 감행해야했다. 1월 위종양 수술에 이어 몸이 자꾸 여기저기 고장나기 시작한다. 어떻게 해줄 수 없는 안달난 마음에 라면을 쌓아둔 부엌을 보고서 속상한 마음에 화를 냈다. 몇 년만에 같이 영화관에 가고 식당에서 밥을 사먹고 지난 4년간 사무쳤던 일상인데 자꾸 한정된 시간이 야속해 뾰족한 말만 앞장섰다. 서로 힘든 시간에 함께 해주지 못한 것에 대한 원망인지 그리움에 대한 투정인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이렇게나 절박하게 외지에서 내 몸 하나 건사하겠다고 먹는거 하나하나 안간힘을 쓰며 챙겨 먹는데 왜 엄마는 그럴 수 없는지 속상했다. 동시에 개별적인 성인으로 각자의 책임감을 갖고 주어진 생활권 내에서 최선을 다하리라 믿어주는 것. 그게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독일에 돌아온 후 친구의 추천으로 <폭싹 속았수다>를 보다가 마가렛 퀄리 배우 때문에 <메이드 : 조용한 희망>을 번갈아가며 봤다. 둘 다 모녀의 탄생에 대해 보여주는 작품으로 보호자라는 개인이 가진 불안과 트라우마가 어떻게 자녀에게 답습되는지를 점진적으로 그린다. 그리고 그 안에서 성인이 된 한 개인은 어떻게 주체적으로 그 되물림을 다른 기운으로 치환 할 수 있는지 안간힘을 쓴다. 이제는 엄마 없는 먼 독일 땅에서 내가 스스로에게 엄마가, 보호자가 되어주기로 또 한 번 결심한다.


아빠는 건설 공사 현장에서 일주일 중 6일을 일한다. 때문에 오후 9시면 고된 몸을 뉘이고 새벽 6시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한다. 매일 사람들을 만나고 늦게 들어왔기에 눈 뜬 채로 아빠 얼굴을 본 날은 손에 꼽을 정도다. 그래도 마지막 주 일요일에는 함께 하루 동안 돌아가신 할아버지, 할머니 묘소와 할머니 집을 돌며 뒤늦은 장례를 치뤘다. 밥집에 함께 가서는 이전과 다르게 해물도 육류도 부러 권하지 않는 아빠를 보며 꽤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삼겹살을 좋아하는 아빠지만 내가 머무는 동안 집에는 단 한 번도 육류가 밥상에 올라오지 않았다.


앉아서 눈 마주치고 얘기하는 성격의 사람이 아니라 10년 넘게 채식 얘기했어도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줄 알았더니만 이제는 몸 생각해서 곰탕 국물이라도 혹은 생선이라도 먹어라는 얘기조차 일절 하지 않는다. 외동딸이 너무 오랫동안 부재한 시간이 아빠에게 꽤나 강렬한 경험이었나보다. 21년 여름 나를 공항으로 데려주고 오는 길 이래 아빠는 가수 문주란의 <공항의 이별>을 귀에 닳도록 들었다고 했다. 그 해 영국에 있는 내게 틈만 나면 그 노래 얘길 해댔다. 사랑한다는 말 조차 낯간지러워서 못하는 60대 한국 남성을 위해 노래는 대신 내게 마음을 전해준다.


“하늘 저 멀리 떠나버린 당신을 못잊어 애태우며 쓸쓸한 발길 돌리면서 그리움 참을길 없어 나는 걸었네”.


아빠에게 나는 여전히 저 망망대해 어딘가 하늘을 부유하고 있는 새인가보다. 여전히 내게 뭐 하면서 먹고 사냐, 밥은 안 굶고 다니냐는 질문을 늘 새롭게 시전하는 사람이다.


유일한 쉬는 날 하루를 나를 위해 할애하겠다고 운전해서 데리고 다니는 그 마음이 깊숙히 다가와서 미안하고 고마웠다. 그리고는 마지막에 아빠가 최근 들어 자격증을 땄다는 크레인과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콘크리트를 덕지덕지 발라 세운 건물을 구경하러 갔다. 많이 듣고 싶었을 그 말을 계속 해줬다. 아빠 진짜 수고 많았다. 아빠 진짜 멋있다.


아빠는 건설 현장에서 만나는 스리랑카, 중국, 파키스탄 등지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들을 보며 내 생각을 한다고 했다. 타지에 나와 한국어 배우며 돈 벌겠다고 애쓰는 모습에 나를 계속 투영하는 모양이다. 약속 된 연금, 노후보장 없이 65세가 넘도록 여전히 일하는 아빠가 안타깝다고 말하니 친구는 아빠가 일할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에 감사해야한다고 했다. 3월 셋째주, 눈이 오는 날에도 아빠는 새벽 같이 일을 나갔다. 일이 조금이라도 덜 고되었으면 그리고 아빠가 나를 떠올리며 함께 일하는 동료들에 대한 마음을 쓸 때 그들로부터도 좋은 기운을 받을 수 있었으면. 신이 있다면 한국에 있는 신에게 빌어야 할 지 독일에 있는 신에게 빌어야 할 지. 알아서 들어주시리라 믿어 보기로 한다.


4년 새 다섯명 이상의 지인이 암을 진단 받았고 그 중 2명을 제외하고는 3-40대다. 내게 세를 내주고 미국에 잠시 건너 간 집주인도 작년 암진단을 받아 최근 항암치료를 모두 마쳤다. 나야 암까진 아니더라도 작년 갑상선저하증 진단으로 내 몸에서 활기가 새어나간다는 것이 어떤 것임을 경험한 사람으로서 암이 가진 위력을 감.히. 상상만 할 수 있다. 정말 신이 계시다면 다정하고 친절한 내 친구들이, 가족이, 힘 없는 사람들에게서 최후의 기쁨들을 앗아가선 안된다.


그러나 그 새 닳고 닳은 세월에 외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각 90대 중반, 80대 중반에 떠났다. 마음의 은인인 직장 동료이자 선생님은 60대 초에 인사도 할 새 없이 떠났다. 4년 만에 한국을 찾는건 불안정한 수입과 거주지 상황 등으로 어렵게 만들어진 기회기도 하지만 떠난 이들의 빈자리를 마주해야 하는 시간이기에 가능하면 피하고 싶었던 것도 있다.


이제 할머니라고 ‘소리 내어 부를 수 있는’ 조부모는 고모할머니 뿐이어서 시차적응이 끝나자마자 할머니네 집에 과일을 들고 찾아갔다. 생각해보니 할머니가 떡을 좋아할 지, 빵을 좋아할 지 몰라 많은 고민을 했는데 그 고민하는 시간이 참 좋았다. 그동안 연락 할 방법을 제대로 못 찾아 죄송했다고 하며 할머니가 내어 준 한국산 딸기를 우걱우걱 먹었다. 모쪼록 잘 먹는게 손녀가 보답하는 방법이니까. 할머니의 냉장고에는 내가 사온 오늘의 딸기가 다시 채워졌다. 이번 한국 방문 내내 찾는 집집마다 딸기 아니면 휴지를 사갔는데 모든 집에 제철 딸기가 넘쳐서 그것도 참 재밌었다.


이태원에서 수십년 옷장사를 한 할머니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옷장을 열어 손녀에게 이 옷 저 옷을 입혀보았다. 브라를 하지 않은 내 젖가슴을 보고 쳐지지 않았다며 예쁘다고 팔십 먹은 할머니가 말했다. 출국 전 날 할머니에게 다시 한 번 전화를 하며 아마 성인이 되고 처음으로 ‘사랑한다’고 하니 할머니가 말랑한 목소리를 냈다. ‘다음에 돌아올 때까지 꼭 살아있어야 해’라는 마음을 힘주어 속으로 삼켰다.


만난 친구와 옛 직장 동료, 친척들을 보니 30년을 서울, 한국에서 참 부지런히도 살았구나 싶었다. 프리랜서로 여러 시민단체와 정당, 영화사, 영화제, 극장 등에서 일을 했기에 중랑, 종로, 송파, 마포, 김포, 서대문, 인천, 수원, 파주 등 많은 이들이 곳곳에 살았다. 그렇기에 함께 찾아갈 장소도, 나눌 수 있는 이야기도, 음식의 기쁨도 많고 넘쳤다.


청국장과 보리밥에 한이 맺혔는지 가보고 싶었던 비건 식당의 절반도 가지 못하고 구수한 향토 한식들을 주로 즐겼다. 말린 고사리가 아닌 생 고사리 나물과 집에서 먹은 들기름은 서럽고 고된 타지살이 재외국민의 마음을 어루고 달래주기에 충분했다. 봄에 태어난 나는 이맘때면 아빠가 산에서 캐다 준 갖가지 나물을 먹으며 자란 애다. 머위, 달래, 생취, 두릅, 돌미나리, 씀바귀. 자녀를 낳는다면 이 중에 이름을 골라 지어야하나라는 고민도 했을 정도인데 그것들은 무뚝뚝한 아빠만의 사랑의 언어였기 때문일테다. 생각해보니 아빠의 이름은 근.춘. 뿌리 근에 봄 춘. 봄의 뿌리인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서 태어난 봄의 자녀이니 어쩌면 제철 음식의 감사함과 향을 누릴 줄 아는 채식인, 비건으로 자란게 당연한 수순이겠구나 고개가 끄덕여진다.


아이들이 있는 집에 초대되어 함께 노는건 또 하나의 호사였다. 사촌 언니의 조카 애기들은 잘 시간이 되자 이모 안 가면 좋겠다며 울면서 잠이 들었다. 아이들에게 하루의 세계와 시간은 어마어마한데 그 안에 내 존재가 그렇게 각인되었다니 분에 넘치게 고마우면서도 미안했다. 친구의 아이들도 4년 전에 뱃속에 있던 친구가 이미 어린이가 되어 이족보행을 하고 있었다. 4년 혹은 그 이상 못 만난 그리움과 재회의 기쁨을 나누자마자 몇 시간 짧게는 1시간 후에는 또 기약 없는 이별이 덮쳤다. 하루에 이런 기쁨과 깊은 슬픔들을 넘실넘실 넘어댔다.


어느 장소에 들어가 사람들을 만나면 금방 편해졌지만 그들을 만나러 가는 길들은 쉽지 않았다. 서울은 사람도 고층 빌딩도 네온 사인도 모든게 너무나 빼곡하고 빨라서 현기증이 일 것 같았다. 카페에 촛불 이외 전깃불을 켜지 않는 촌구석 베를린에서 온 사람으로서는 눈을 꿈뻑꿈뻑거리며 30년을 넘게 나고 자란 곳인데도 자꾸 시선을 어디에 둘 줄 몰라 어리둥절해했다. 레스토랑과 병원 등지에서는 광속도의 일처리를 하는 사람들 앞에서 한국말을 쭈뼛쭈뼛 읊조렸다. AI가 이름을 불러주는 병원, 사람이 아닌 기계로 음식 주문을 하는 식당, 도시를 횡단하는 플라스틱 용기에 담긴 팔팔 끓는 배달 음식. 카페에 앉아 머그잔에 정취로 커피를 마시기보다 수혈로 아이스커피를 마시는 사람들.


산도 있고 강도 있고 운치가 넘치는 도시인데 도시의 시간이 조금 천천히 흘렀으면 좋겠다.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내 주변 친구들은 대게 이 운치를 빚을 줄 아는 사람들이다. 이번 한국 여행에서 마주했던 건 많은 삶의 피로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그토록 예찬하는 사랑하는 이들의 일상을 잠시나마 들여다 볼 수 있었다는 특권이다. 어찌 할 도리 없는 시간의 수순을 받아들이는 과정인 여행이기도 했지만 이제 이런 질문을 시작한다.


사람들이 때때로 나보다 나를 좋아해주고, 스스로는 보지 못하는 심연을 들여다봐주는 것처럼 그 곳에 내가 닿을 수 있을까? 저 대륙 너머에 알뜰 살뜰 가꿔 온 Homeland(홈랜드, 조국)라는 세계와 여전히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과 함께 이 곳 독일에서 나는 스스로에게 어떤 사람이고 싶나.


사람들에게 얘기한 것처럼 아마 몇 년은 더 독일에 지내볼 참이지만 또 모를 일이다. 한국에 돌아온다면 다니고 싶은 직장, 살고 싶은 동네도 그려진다. 그리고 친구들과 도모 할 많은 일들을 상상하기도 한다. 적금을 붓기 시작했으니 운이 좋다면 다음 한국 방문은 이전처럼 오래 걸리지는 않겠지만 그 사이 한국이, 내가 자란 도시가 그리고 사람들의 피로가 너무 빠른 속도로 휩쓸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4월이면 이제 두릅이 철인데 내가 먹고 가지 못한 두릅들 대신 많이 먹고 살살 재밌게 잘 살고 있어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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